2023.03.12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생일맞이 파티로 밤을 꼴딱 새운 덕분에 오늘은 일요일에 도서관에 왔다. 어제는 날씨가 좋더니 하필 비가 오고 있다. 날은 흐리고 밖은 추운데 실내는 덥다. 카페에서 책 한 권 읽기 딱 좋은 날씨다.
오랜만에 수필 섹션에서 책을 두 권이나 빌렸다. 안예은의 <안일한 하루>는 트위터에서 종종 봤고, 언젠가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던 참이라 도서관에서 발견했을 때에는 반갑기까지 했다. 집에서 자기 전에 읽으려고 했는데 카페에 앉아서 즉흥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가수 안예은. 사실 잘 모른다. (미안합니다) 나의 오래된 자아 중 한 부분은 굉장한 오타쿠이고, 어떤 장르를 덕질할 때 필수 코스 중 하나가 안예은의 곡으로 만든 팬 뮤비를 보는 것이었다. 그때 들었던 엄청 특이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한 사람이 안예은이라는 사실만 내게 남았다. 이름이 되게 예쁘다… 고 생각했던 기억.
하여튼 그런 노래를 한 가수의 일상이라니 분명 아주, 아주 특이할 거라고 생각했다. 반 정도는 맞고 나머지는 틀린 추측이었다.
<안-일한 하루>는 무거운 몸뚱이를 끙차, 이끌고 직장으로 출근하는 안예은으로 시작한다. 연예인도 출근을 하나요? Y..E…S…. 나 역시 김연아의 “뭔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를 모토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반가운 도입부가 아닐 수 없었다. 분명 제목과 표지에서 예상되었던 것이었다.
책은 전반적으로 담백했다. 아마 안예은 본인의 성향이 묻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무뚝뚝하고, 상대적으로 상처를 덜 받고, 잘 울지 않는 자신의 성격을 잘 알고 있다. 선을 넘지 않고 무심하게 툭, 자신의 의견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듯한 그런 느낌. 수심 깊은 이야기를 할 때에도 그렇다.
그럼에도 그가 선천적으로 가진 다정한 면이 자주 느껴졌다. 본인은 그 사실을 쑥쓰러이 여기는 듯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쓴 것 같기는 하지만. 우울이나 질병, 누군가의 동정 어린 시선을 받는 기분과 같은 주제를 무겁지 않게 풀어내는 방식은 결코 안일하지 않다. 어떤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수심은 깊어지기 마련인데, 그는 이따금 잔을 흔들어 바닥에 가라앉으려는 찻잎을 수면으로 돌려보낸다. 확실히 선을 긋고 있다.
선을 긋는다는 표현이 서운하게 들릴 수는 있어도, 다소 드라이하게 느껴지는 그의 태도는 오히려 위로다.
에세이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경계가 모호하거나 지나치게 깊은 수심 속에 있는 책이 많다. 특히 에세이라는 장르가 그런 것 같다. 남의 힘듦을 가벼이 여기려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불행은 미디어 속 신파가 아니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초반에 그 자신이 에세이를 많이 읽진 않는다고 했는데, 그럼에도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다니 과연 좋은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흉터나 병을 대하는 건조함은 어떤 이에게는 위로가 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용기가 된다. 용기의 원천이 된다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다. 그가 이 사실을 알아준다면 좋을 텐데.
본업이 가수이기에 들을 수 있는 작업 이야기도 퍽이나 재미있다. 기껏해야 몇 곡 아는 수준이지만 내 안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안예은표 곡들의 파편들이 있다. 그것들이 떠오르면서 이런 곡과 가사를 쓰는 영혼이 이 정도로 담대해지기까지 어느 정도의 우여곡절이 있었을지는, 그래. 생략된 이야기가 더 많을 것이라는 추측.
또 들은 적 없는 곡의 가사가 적힌 페이지는 한참 넘어갈 수 없었다. 창작자라는 존재들은 어쩜 이렇게 나를 울리는 걸까? 작가와는 달리 이 독자는 눈물이 많다. 산타의 필체로 사람을 울리다니. 이제 곧 팬이 될 것 같으니 각오하세요. 하필 이런 날 이어폰을 안 가져왔다. 집에 가면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