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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의 그늘 Apr 11. 2023

매주 도서관 가는 일기: 슬픔은 병일지도 몰라

23.03.04






아몬드 라떼가 엄청 달다. 무려 칠 천 원짜리 음료를 시켜 앉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연히 임상심리 섹션을 돌다가 정신질환, 그중에서도 우울증에 관한 책들이 모여있는 곳을 발견한 것이다. 연이어 이어진 슬픔과 우울.. 그런 단어들을 눈으로 훑었다. 표지들은 왜들 그리 칙칙한 색인지!








내게도 우울의 기간이 있었다. 아마 아주 흔한 농도였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시간이 지나면 잊음직한. 그런데도 그때의 감정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나도 모르게 개중 가장 밝은 컬러의 책 등을 뽑아내어 나왔다.


가난의 시절에 차마 먹지 못했던 달디 단 음료를 주문해 앉으며 이제 괜찮다, 이제 괜찮아졌다를 되뇌었다. 나의 우울은 괜찮아졌다가도 아주 사소한 이유로 널뛰기를 하곤 한다. 얼른 책을 읽어 치운 다음 안정을 얻어야겠다. 카페에 앉아 소지품을 다 정리하기도 전에 허겁지겁 책부터 읽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나와 다른 농도를 가진 타인의 우울은 위안이 된다. 사회가 우울증에 관대해지면서 나를 포함한 주변에서 우울증에 관한 이야기를 쉽게 접하게 되었다. 문득 우울이 커피 같다는 생각을 한다. 우울을 원해서 마시는 사람은 없겠지만.


어떤 사람은 샷에 샷에 또 샷을 추가해서 진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가 하면, 누군가는 물도 우유도 타지 않은 원액을 마시는 것 같다. 개중에는 나처럼 시럽을 잔뜩 타서 먹을만하게 만든 잔을 받는 사람도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아몬드 라떼가 유난히 달았다.




이토록 명료하게 죽음에 확신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저자는 죽음을 분석하여 합리적인 결과로써 바라고 있었다(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하늘이 예쁜 어느 날에, 자기는 후회되는 것이 하나도 없고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했으니 이렇게 좋은 날을 마지막으로 떠나는 것만이 남았다는 문장에서는 나까지 설득당할 뻔했다.


후회되는 것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다니? 나는 후회되는 것이 너무 많아서 죽고 싶었다. 이토록 다른 두 대립을 보고 나니 새삼 우리가 정말 질환을 앓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는 내내 그는 고요한 호수 같았으나 깊은 바닥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읽는 내내 파도에 이리저리 떠밀렸다. 죽어야겠다는 그의 말에 동요하기도 했고, 주치의 선생님의 치료법 제안 중 몇 가지는 메모해두기도 했다. 그럼에도 300 페이지의 끝에 다다를 때 즈음에는 독자로서 그를 응원하게 되었다. 살기로 결심하는 일이 이렇게 힘들었는데, 이왕이면 꼭 행복하세요. 꼭이요.



또 내 주변에 아픔을 공유하는 친구들 생각도 했다. 그들의 마음은 또 어떻게 다를까? 내가 지나치게 내 위주로 생각해서 응답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는 계기이기도 했다. 내가 아몬드 라떼를 마시고 있어도 그는 에스프레소 포샷을 마시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언어는 우리를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로 한데 묶는다. 나조차 그렇게 간단히 생각하고 있었다. 깊은 반성.



우울증을 다루는 에세이는 자주 읽지 않았다. 사실은 별로 안 좋아한다. 언젠가 성공적인 해피엔딩으로 끝나버린 에세이를 읽고 강렬한 질투와 열등감에 사로잡힌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저자가 너무 부러운 나머지 되려 살기 싫었다. (당연히 그 책의 잘못이 아니다) 아주 오랜만에 이런 류의 책을 읽는다.


그럼에도 관련 에세이 중에서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책임은 확실하다. 책의 중후반부에 주치의 선생님이 우울증과 죽음 중독을 별개로 구분 지어 부르는 장면이 있는데, 아마도 그게 이 책이 가진 독특함의 핵심인 것 같다. 우울하고 무기력함이 주로 묘사되는 다른 산문들과는 달리, 확고한 신념과 깨끗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 죽음에 중독되어 있는 상황이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용서. 타인을 향한 용서와 자기 자신을 향한 용서, 그 두 개의 향이 엄청 짙어서 아직도 생각이 난다. 용서는 이기적인 행위라는 말. 처음엔 잘 와닿지 않았지만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용서는 전적으로 나를 위한 행위인 것이다.



돌아보니 내 상황과는 너무 달라서 오히려 위로를 받은 것 같다. 카페에서 눈시울까지 붉혀가며 한 권을 꼬박 읽어냈다. 흔들렸던, 흔들리는 중인 사람이 나누고자 하는 위안을 손에 쥐고 싶은 사람에게 좋은 위로가 될 것 같다. 약간 수심이 깊다는 느낌이 있기는 하지만, 때로는 그래야만 하는 것들도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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