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품픽] 회사 알레르기지만 괜찮아 9화
“오늘 공연 정말 멋졌어요. 모두들 잘하셨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특히 태훈씨는 연극동호회에 들어오신지도 얼마 안 되셨는데, 오늘 연기 너무 자연스럽고 좋았어요.
정말 연기 배우신적 없는 것 맞아요? 비결이 뭐예요?”
“연기를 배운적은 없는데... 비결이라면 회사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체득된 것 같습니다.”
“회사 생활에서 연기를 체득했다고요?”
“네, 부장님 앞에서는 순종적이며 혼자 일 다하는 실력자 역할,
동료를 사이에서는 윗사람에게 인정받으며 잘나가는 실세 역할,
부하직원 앞에서는 작렬하는 카리스마로 분위기를 압도하고 일을 떠넘기는 역할
퇴근 후에 아이들 앞에서는 다정하고 무엇이든 잘하는 자랑스러운 아빠 역할 등
여러 가지 캐릭터를 소화해 온 것이 도움되지 않았나 싶네요.”
회사 생활은 다양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합니다.
퇴근 후 부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몇 가지 간단히 물어보는 것에 대해 답해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딸이 놀란 표정으로 묻는 것이 아닌가.
"아빠, 왜 그렇게 전화를 이상하게 받아. 목소리는 왜 그래"
딸아이는 내가 그렇게 딱딱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하는 것을 처음 본 모양이다.
"아빠가 전화받는 게 이상했어?"
"응, 우리 아빠가 아닌 것 같았어"
그렇다. 나는 출근길에 오르는 순간 회사 모드로 변신한다. 마치 무대에 오르는 연기자처럼...
표정도 목소리도 생각까지도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 시간을 보낼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다.
누구나 장소나 만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은 다른 모습을 보이겠지만 나는 정말 완전히 달라진다.
진짜 자아는 집에 고이 모셔두고, 회사 모드로 완전히 변신한 상태로 출근을 한다.
전화를 받는 모습만으로도 딸아이가 놀랄 정도인데, 회사에서 생활하는 내 모습을 가족들이 본다면 얼마나 놀랄지 상상이 안된다. 사실 회사에서의 내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지도 않다.
출근과 동시에 회사 알레르기 증상이 도지며
좋지 않은 모습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부터 긴장이 되면서 나의 모든 근육이 위축되는 걸 느낄 수 있다.
윗사람들이 출근을 하면 마치 권투선수가 가드를 올리듯이 언제 날아올지 모를 공격에 대비한 방어태세를 갖춘다. 그분들의 입장에서는 가벼운 잽 정도를 날린다 해도, 윗사람 울렁증이 있는 나는 그 공격을 강한 훅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잔뜩 긴장하고 가드를 올린 채 쫄아있는 모습이 괜찮아 보일 리 없다.
항상 긴장하고 있는 나머지 행동은 부자연스럽고, 말을 할 때 목소리도 크게 낼 수 없다. 상대가 못 알아들은 것 같아 좀 크게 말하다 보면 목소리가 갈라지면서 더 우스운 꼴이 되고 만다.
일과를 마치고 사무실 문을 나서면 비로소 가드를 내리고 긴장을 푼다. 나와 퇴근 후 술자리를 갖는 회사 동료들은 내가 긴장을 푼 모습을 보고 모두들 한 마디씩 하곤 했다.
“술 드시니까 완전 다른 사람 같아요. 뭔가 봉인이 해제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모르고 하는 소리다. 나는 술이 꽤 센 편이고, 소주 몇 잔 마시고 술기운이 올라 캐릭터가 변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면 바로 잡아준다.
“술 마셔서 그런 게 아니라 퇴근해서 그런 거예요"
술이 아무리 취한다고 해도 회사 사람들과 있을 때는 진짜 내 모습이 아니다. 그런 점은 사실 회사 생활하는데 장점으로 작용한다. 덕분에 회사 사람들은 내가 주사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나의 주사를 좋아하고 즐긴다. 나는 술에 취하면 말이 정말 많아진다. 일주일 내내 회사에서 하는 말보다 주말에 친구들이나 친척 또는 회사 사람이 아닌 지인들을 만나 술을 마시는 1시간 동안 하는 말이 더 많을 것이다. 회사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질 때는 간간이 대화에 참여하는 정도인데 반해, 다른 지인들과 있을 때는 대부분의 대화를 내가 이끌어 간다. 말을 재치 있게 잘해서 재미있다는 칭찬도 종종 듣는다. 회사 동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회사 모드로의 전환 때문에 불편하거나 곤란한 점이 많다.
회사 근무 중에는 와이프가 전화를 해도 잘 받지 않는다. 계속 전화가 오면 무슨 급한일이 있나 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는다. 근무 시간에 사적인 전화를 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좋을 것 같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회사 사람들에게 나의 가족 모드를 보여주기도 싫고, 와이프에게 회사 모드로 말하기도 어색하기 때문이다.
친구 중 하나가 우리 회사로 이직을 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본사에 근무하고 있는 나에게 혹시 인사팀과 본인 관련 업무 부서에 친한 사람 있으면 기회가 될 때 슬쩍 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펄쩍 뛰며 강하게 반대했다. 친구 녀석은 내가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줄로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나는 지금처럼 너와 좋은 친구사이로 지내고 싶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친구가 우리 회사에 들어와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이 싫었고, 그러면서 친한 사이가 어색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다중 인격자로 만들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오랜 시간 회사 생활을 하며 얻게 된 다양한 증후군들*이 복합적으로 증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리라.
결론적으로 내가 깨어있는 시간 중
80% 이상을 보내는 곳에는 진정한 내가 없다.
퇴근 후에야 겨우 진정한 나로 돌아온다. 그나마도 회사에서 무난한 하루를 보냈을 때의 이야기이다.
일과 사람에 치인 날에는 집에 돌아와도 힐링을 하면서 나 자신을 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어쩔 때는 나 자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잠들 때도 있다. 주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올리고 있던 가드를 내리고, 나를 옭아매고 있던 멍에도 벗어던지고, 온갖 증후군의 증상까지 스스로 치유하면서 진짜 내 모습으로 진정한 나의 시간을 즐긴다.
이제는 깨어있는 시간의 100%를 진짜 내 모습을 유지한 채 살고 싶다.
그래야 내 인생의 100%가 진정한 나의 시간이 될 테니까.
*회사 알레르기 8화 “자존감 브레이커"참조
*[논품픽] 논픽션 품은 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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