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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서 Aug 18. 2024

거지 같은 '타이밍'

'어남류'의 패배에서 어긋난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렇구나. 잘 가." 대학생 시절, 어긋난 버렸던 '썸남'의 마지막 말입니다. 그에게서 서툰 고백을 받았으나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 된 탓이었을까요? 부담스러운 마음에 도망치듯 피해버렸거든요. 이후 버스를 탄 저는 그에게 "아직 잘 모르겠다"는 메시지를 보냈어요. 이에 썸남은 저에게 "버스를 탔냐"라고 묻더군요. 제가 그렇다고 하자, 그는 체념한 듯 "잘 가"라고 답했습니다.


지금도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그때 답장을 보내는 대신, 리는 버스에서 내려서 그에게 달려갔다면, 당시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상상 말이죠.

 

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듯이 어긋난 인연을 다시 회복하는 것도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저는 또 다른 인연들과 마주하게 되고, 어느 날은 과거의 저를 떠올리게 하는 드라마 한 편을 보게 되었죠.


한때, 여주인공의 남편 찾기로 화제였던 tvN <응답하라> 시리즈인데요. 이 가운데 <응답하라 1988>은 '어남류(어차피 남편은 류준열)'와 '어남택(어차피 남편은 최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화제였죠. 드라마 초중반 때만 해도, '어남류'가 우세했지만 저는 '어남택'을 밀었습니다. 여자 주인공에게 투덜대는 '츤데레' 타입인 정환(류준열이 드라마에서 맡은 역할)이 보통 로맨스물의 남자주인공일 때가 많지만, 어쩐지 정환이는 매번 결정적인 타이밍을 놓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반대로 최택(박보검)은 극 초반부터 덕선이에 대한 마음을 분명하게 표현하며 직진하고요. 예로 정환이가 친구들 앞에서 덕선이에 대한 마음을 숨긴 반면 택이는 "나 덕선이 좋아해. 친구가 아니라 여자로 좋아"라고 공개 선언을 한 장면만 봐도 둘의 차이가 분명하죠. 하이라이트는 덕선이가 기존 약속이 깨져서 혼자가 됐을 때였습니다. 이때 덕선이에게 갈지 말지 오랜 시간 고민한 정환이와는 달리 택이는 중요한 일정까지 포기하면서 덕선이에게 달려갔죠. 결국 택이보다 한 발 늦은 정환이가 아쉬움을 토해내며 내뱉는 내레이션은 지금 들어도 아련합니다.


내 첫사랑은 늘 거지 같은 타이밍에 발목 잡혔다. 그 빌어먹을 타이밍에. 그러나 운명은... 그리고 타이밍은 그저 찾아드는 우연이 아니다. 간절함을 향한 숱한 선택들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순간이다. 주저 없는 포기와 망설임 없는 결정들이 타이밍을 만든다. 그 녀석이 더 간절했고 나는 더 용기를 냈어야 했다. 나빴던 건 신호등이 아니라 타이밍이 아니라- 내 수많은 망설임들이었다.


좋은 작품은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자신의 삶까지 돌아보게 한다는 말이 있죠. 제게는 <응답하라 1988>이 그랬습니다. 정환이와 덕선이를 보면서 과거 어긋났던 첫사랑의 추억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요. 택이의 용기 있는 모습에선 완벽한 타이밍을 만드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의 결단이라는 것도 새삼 깨달았고요.


물론 정환이가 덕선이를 향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정환이도 본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지만 덕선이와 그 정도까지의 인연은 아니었다고 보는 게 더 맞지 않을까요? 드라마는 정환이가 자신의 짝사랑을 포기하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만약 결말 이후의 세계를 떠올릴 수 있다면- 정환이 역시 자신에게 잘 맞는 짝을 만나 행복해졌을 거라고 봐요. 이전보다 훨씬 성숙해진 모습으로 용기를 내, 사랑을 쟁취했을 거라는 생각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렇게 보니, "인간은 선택을 통해 주체적으로 자신만의 본질을 만들어간다"라고 주장한 사르트르가 떠오르는군요. 쉽게 말해, 드라마 속 택이와 정환이는 매 순간 자신에게 걸맞은 선택을 하면서 자기 다운 모습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만약 정환이가 택이처럼 행동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정환이'라고 볼 수 없으니까요. 드라마의 기존 전개도 전부 수정해야 할 것이고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기존 드라마에서 느낀 여운과 아련함은 사라질지도 모르겠군요.


드라마에서 다시 저의 이야기를 떠올려봅니다. 시간이 흘러 과거 '썸남'과의 기억은 어린 날의 추억으로 자리 잡았어요. 그 시절의 망설임은 한동안 저를 쓰라리게도 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고맙기까지 합니다. 그런 아픔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저를 변화시켰거든요. 이제는 주저 없이 용기를 내 타이밍을 잡는 사람이 됐으니까요. 이렇게 보니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도 맞는 것 같네요. 결국 모든 선택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것도요.


이 글을 읽을 여러분의 삶도 궁금해지네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선택을 하셨을 테니까요. 아마 그중에는 과거의 저나 드라마 속 정환이처럼 후회로 남는 기억도 있으시겠죠. 하지만 그것마저 결국 자기 다운 삶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고 봐요. 이처럼 우리는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통해 자신이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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