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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서 Aug 25. 2024

유리병 속 사탕을 채우는 일

사탕의 종류가 다양하듯이 인생의 행복도 매 순간 다른 맛


"언제쯤 6학년이 될까?" 초등학교 1학년 때입니다. 어느 날 치과를 방문했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제 치아를 살펴보시더니 6학년쯤 되면 교정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제 겨우 1학년인데, 6학년이 되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시간이 정말 더디게 흐르는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흐른 거죠? 아직도 마음은 어린 시절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말이죠. 언제 6학년이 될지 궁금해하던 꼬마는 이제 서른이 넘은 나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럴 때 보면 인생이란 참으로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하죠. 어린 시절,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저를 상상할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의 저도 중, 노년의 모습을 멀게만 느끼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시간 또한 눈 깜짝할 새도 없이 빠르게 다가오겠죠? 그때의 저는 지금을 어떤 모습으로 추억하고 있을까요?


하지만 시간의 흐름이 야속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젊었던 부모님의 얼굴에서 깊은 주름을 발견할 때마다, 어린 시절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전해주셨던 옛 어른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것을 마주할 때마다, 그리고 저 역시 나이 듦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마다요.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은 때때로 인간은 허무하게 만들곤 합니다. 저 역시 그러한 허무함 속에 빠져 있을 때가 있었죠.


그런데 어느 날, 한 편의 드라마가 제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습니다. 최근 종영한 tvN <눈물의 여왕(2024)>을 살펴보면, 주인공 홍해인(김지원)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돼요. 삶의 유한함을 알게 된 뒤에야 일상의 가치를 이해한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흔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 드라마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해인은 인생을 '유리병'에 비유하며 이렇게 말하거든요.




지금은 좋지만 살다 보면 또 고비가 올 거야. 그럼 그 달콤했던 기억들을 유리병에서 사탕 꺼내 먹듯이 하나씩 꺼내 먹으면서 힘들고 쓴 시간을 견뎌내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는 좋을 때 그 기억들을 잔뜩 모아둬야 하는 거라고!

이 말은 유리병 속 사탕을 하나씩 꺼내 먹으며 피로를 달래듯, 행복한 추억으로 인생의 어려움을 견뎌내자는 의미였습니다. 해인의 말을 곱씹다 보니, 저에게도 행복한 추억들이 꽤 많았더군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이 못내 아쉽고 서운하게 느껴졌지만, 그 흐름 속에서 많은 행복을 경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죠.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인간의 행복이 물질이 아닌, 내면의 상태에 달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해인의 변화된 삶을 보며, 저는 에픽테토스의 철학이 옳았음을 실감하게 되었네요. 해인은 외부 상황에 휘둘리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변화시키기로 결심했으니까요. 이는 그녀가 이제 주식이나 재산을 모으기보다, 행복한 기억을 모으는 데 집중하겠다고 선언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해인의 이런 태도는 에픽테토스가 강조한 내적 통제와 덕을 실천하는 삶의 자세와도 일맥상통하지 않나요? 그녀가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도 결국 외부 환경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행복의 근원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해인의 변화를 지켜보며 저 또한 지난날을 돌아보게 됩니다. 떠올려볼수록,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이 그저 야속한 것만은 아님을 깨닫는군요. 그 시간 속에는 매 순간의 저를 웃음 짓게 했던 행복의 기억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거든요. 어떤 순간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보는 것만으로도, 선선한 바람을 쐬며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무심코 잡은 책과 영화에서 인상 깊은 구절과 장면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더군요. 그간 인연을 맺었던 이들과의 지난 시간에서도 즐겁게 추억할 수 있는 순간들이 많았고요.


이렇게 보니, 제 삶을 채웠던 소소한 모든 것들이 매 순간의 저를 살아가게 했네요. 때로는 인생의 한 복판에서 지루함과 허무함에 빠져 괴롭기도 했으나, 그 순간마저도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텅 비어있다고 지레 짐작했던 제 인생의 유리병에도 달콤한 사탕 같은 추억들이 넘쳤음을 알게 된 것이죠.


사탕의 맛이 한 종류만 있는 게 아니듯이 인생의 행복도 매 순간 다른 맛을 하고 있을 거란 사실도 저를 설레게 합니다. 그 사탕은 먹어도 먹어도 끝없이 다시 채워진다는 것도요. 앞으로도 저는 사탕을 계속해서 모아갈 생각입니다. 참, 더는 사탕을 넣을 틈도 없이 유리병이 가득 차면 어떡하냐고요?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내면이 성숙해지듯이, 유리병 또한 더욱 깊어진답니다. 여러분의 유리병은 안녕하신가요? 지금 어떤 사탕을 모아가고 계신지도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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