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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이 넘은 나이에, 가출을 저질러버렸습니다

'출가'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 드라마 '악귀'

by 소서

"난 한순간도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없었어.” SBS <악귀> 마지막 회에서 산영(김태리)의 내레이션이 흐르던 순간, 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은 나에게 낯설지만 강렬한 공감으로 다가왔다. 산영의 고백은 나를 2021년 겨울, 내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데려갔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만을 위한 선택'을 한 순간이었다.


짐은 미리 서울의 한 원룸텔로 보내 두었고, 그날은 몸만 빠져나왔다. 어릴 적부터 살아온 집을 떠나며 가방을 손에 든 내 모습이,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도착한 원룸텔은 침대와 책상, 옷장만으로도 가득 찬 작은 공간이었다. 문을 닫고 침대에 몸을 눕히며 휴대폰 전원을 껐다. 오랜 시간 가족의 통화 목록에 갇혀 있던 전화기를 손에서 내려놓자 묘한 해방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그 해방감도 잠시, 차가운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후련하면서도 괴로웠다. 좀더 떳떳하게 집을 나오고 싶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싶어서.


이하 방송 장면


그해 겨울, 부모님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다. 고성이 오가는 날들이 반복되며 집안의 공기는 살얼음판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나는 그동안 이런 상황을 친구들과의 대화로 버텨내려 했다. 그럴 때마다 독립을 추천받았지만 나는 늘 현실에 순응하고 말았다. 떠나고 싶다는 마음만 있었을 뿐, 그럴 용기는 없었던 게 과거의 나였다.


독립을 결심하기 전까지, 내 마음속은 끝없는 갈등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나는 마치 폭력에 길들여진 사람처럼,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나가봐야 더 나아질 게 있을까? 거기서도 결국 실패하고 말 거야.'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나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집을 떠난다는 생각은 마치 낯선 바다로 나 홀로 배를 띄우는 일처럼 막연하고도 두려웠다. 내가 그동안 살아온 모든 삶의 방식이 그 집 안에서만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낯선 곳에서의 생활은 내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고, 그 미지의 세계는 나를 위축시키기에 충분했다.


가장 두려웠던 건 "나 혼자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은 마치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처럼, 모든 결심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집에서의 삶은 비록 고통스러웠지만, 그 익숙함 속에는 안정감이 있었다. 그 안정감은 실체 없는 환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환상에 기대어 현실을 견디고 있었다. '이것이 나의 삶이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렇게 나 자신을 납득시키며 살아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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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현실은 나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때로는 내가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집이라는 공간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었다.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지쳐버렸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사라지는 대신, 도망쳐보면 어떨까?' 그 순간, 나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렬한 충동이 나를 움직였다.


물론 그 결심은 단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두려움과 희망, 망설임과 용기가 뒤섞인 혼란 속에서 나는 매일 수백 번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정말로 괜찮을까?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매일 밤, 그 질문들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이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오히려 나를 죽이고 있다는 것을.


독립을 선택하는 것은 단지 공간을 옮기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묶고 있던 모든 사슬을 끊어내는 일이었다. 나를 갉아먹던 현실에 더 이상 자신을 내맡기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그 선택이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운지 알면서도,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갑작스럽게 집을 떠날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부모님께 조심스럽게 독립 의사를 밝혔다. 부모님은 내게 "조금만 더 참아라. 겨울만 견디고 봄에 떠나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그 말은 설득이 아니라 마치 나를 붙잡으려는 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끈을 계속 붙잡고 있으면, 나라는 존재가 점점 더 희미해질 것 같았다. 그 집에 머물면 내가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내 마음은 벼랑 끝에 서 있었고,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원룸에서의 첫날 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작은 방 한구석의 침대에 몸을 뉘자마자, 선택의 무게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내가 스스로 내린 결정인데도,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 걸까. 머릿속은 혼란스럽고, 가슴속에는 묘한 공허감이 자리 잡았다. 익숙한 집을 떠나왔다는 사실이 어딘가 모르게 나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이게 내가 원했던 자유일까?'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그 밤의 고요 속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다시 물었다. '나는 진짜로 올바른 선택을 한 걸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조금씩 깨달았다. 이 낯선 공간이야말로 내가 처음으로 선택한 삶이라는 것을.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나 내 힘으로 선택하고 내 발로 나아간 공간이었다. 비록 작고 초라했지만, 이 공간만큼은 오롯이 내 것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점차 마음이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의 시작이라는 것을, 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연구에 따르면, 부모의 싸움은 아이들에게 전쟁 같은 두려움으로 남는다고 한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의 갈등 속에서 나는 늘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다. 그렇기에, 그때의 내 선택은 단순히 물리적인 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갉아먹던 두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는 선언이었다.


"오직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택할 거야." 그렇기에 드라마 속 산영의 결심은 지금도 내 마음 깊숙이 남아 있다. 그 겨울, 집을 떠난 내 선택은 내가 나를 위해 처음으로 내딛은 용기의 발걸음이었다. 그 선택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나는 확신한다. 그것이 내게 가장 필요했던 선택이었다는 것을. 그 이후로 나는 내 삶의 주인으로서, 이제는 스스로 선택한 길에서 매일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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