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의 마음

by 승아

첫 노트를 쓰는 일은 항상 설레고 두렵다. 원하는 글을 마음껏 적을 수 있다는 연필의 자유와 미처 적히지 못한 글자들에 대한 지우개의 미안함 때문이겠지. 두 마음을 저울에 올려놓고 한참을 지켜보았다. 적혀질 오늘은 잊혀진 어제보다 의미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결국은 노트를 펴고 오늘을 샅샅이 살핀다. 이불, 달걀, 향기, 눈, 딸꾹질… 그래 맞아, 오늘 꿨던 꿈이 있었지. 예상치 못한 이 노트가 내 앞에 도착하기 전 예언처럼 찾아왔던 꿈이. 학교의 깊숙한 곳에는 오래전 연락이 끊긴 친구 한 명과 절실한 내가 있었다. 세월에 좀 먹은 사이에 대해 말할 겨를도 없이 내가 놓인 상황은 꽤나 급박했는데, 그 이유는 내 품에 가득 담긴 노트 때문이었다. 무언가가 적힌 노트도 아닌 포장도 뜯지 않은 새 노트들. 오랜 시간 그리워했던 내 옆의 그는 빨리 이 곳을 나가야 한다고, 누군가 들어와 우리의 죄가 들통나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며 두 발치 앞서서 나를 채근했다. 급한 마음에 걸음은 엉키고 품 안의 노트들은 바닥에 쏟아진 그곳에서 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노트를 주울 것인지, 이 곳을 벗어날 것인지. 발만 동동 거리다 잠에서 깼을 때는 알람보다 2분 앞선 시간이었다.


품 안에 남아있던 몇 권의 노트 덕분이었을까. 새로운 노트 두 권 중 어두운 바다를 선택한 지금은 또 다른 잠을 청해야 하는 때이다. 눈을 감으면 지난밤, 못다 한 선택의 순간이 다시 한번 내 앞에 등장할 것만 같아 생각해 본다.

노트를 주울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무의식 속의 노트는 의식 속의 무엇을 의미할까. 물음을 더할수록 무의식은 저 멀리 모습을 숨긴다. 머리가 뿌예질수록 펜은 더 빠르게 돌아간다. 정해진 건 하나도 없지만, 뭔가는 정해질 것이라는 첫 번째 페이지의 설렘에 취해 글자만 하염없이 적는다.


자취를 좇는 일, 걸음을 추적하는 일, 단서를 찾는 일. 나에게 글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생으로부터 주어지는 수많은 질문들에게 답하는 것. 머리가 아닌 가슴은 항상 정답을 말하는 법이니까. 이불에 뒤덮여, 일감에 찌들어, 감정에 치여 유괴된 나의 영혼을 끈질기게 탐색하는 것이다. 이성에 갇혀 소리 내지 못한 나의 영혼을 위로하는 일. 거짓된 마음과 유실된 순간 속에서도 연필을 세게 잡고 짙은 농도로 울부짖는 나의 글쓰기. 깊은 진심으로 가는 길을 만드는 이 글쓰기는 고로 헛되지 않다. 길 잃은 영혼에게 전하는 말들. 내가 여기 있다. 너를 만나러 가고 있다.


입술을 달싹이며 글을 적는 나는 다짐했다. 오늘 밤엔 꼭 노트를 주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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