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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편린들

사랑한다는 것(The art of loving)

에리히 프롬의 글에 부쳐

by 소슬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보통 이상형을 얘기하거나 하는데 저는 그런 것이 없었거든요.

그냥 제가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면 아마도 그 사람 자체가 좋지 않은 이상 좋아할 이유를 끼워 맞추진 않을 것 같다고,

오래도록 생각해 왔습니다.


왜냐면 그것들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조건’들 중 하나이고 그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지니고 있는 몇 개의 것들 중 제 마음대로 입맛에 맞게 퍼즐처럼 끼워 맞추는 것이기 때문이죠.

말하자면 저는 일종의 모든 조건들을 배제하고 ‘그 사람 자체’가 좋은지 안 좋은지에 따라 사람을 좋아할지 말지를 판단하는 편입니다.


어떤 면이 좋다든가는 부차적인 문제고요. 단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속성들이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러나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은 사랑할 줄도 주목할 줄도 인식할 줄도 안다.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이 늘면 늘수록 그것에 대한 사랑도 또한 커진다. ······딸기가 익을 때 다른 모든 과일도 같이 익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포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파라셀수스


사랑의 대상이 무엇이든,

알면 알수록 애정이 깊어지는 건 어떤 것이든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저는 차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데 매해 매해 나오는 일기일회의 차들을 맛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거든요.

매해매해 또다시 사랑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찻잎이라는 것이 어디까지 변할 수 있는지 어떤 향과 맛을 내줄지 늘 궁금하고 테이스팅을 할 때마다 즐겁습니다.


알아간다는 것의 즐거움, 깊이가 생기는 아늑함, 앎에 앎을 더하는 일체의 행위가 좋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것, 즉 자신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주로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어떻게 하면 사랑을 받을 수 있으며, 또 어떻게 하면 사랑스럽게 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역시 제가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이겠지요.

좋아함에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 노력을 지속하는 것 또한 일종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든 예시는 차와 찻잎이라서 사람과의 관계와는 좀 다를까? 하고 생각했었는데요.

그 어떤 관계든 위와 같은 맥락으로 접근하게 되더라고요.


사랑받고자 노력하기보다는,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훨씬 더 깊이 있게 상대방을 배려하고 더욱더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좋지만,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가 주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랑받는 대상으로 존재하기보다, 사랑하는 주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저는 좋습니다. 그래야 제 마음이 편안하고 풍성해지는 것 같아요.


이렇게 자신을 독립적인 실재로서 인식하고, 자신의 짧은 인생을 의식한다. 또한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났고,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보다 자기가 먼저, 또는 자기보다 그 사람이 먼저 죽을 것을 알고 있다. 또 자신이 고독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자연이나 사회의 힘 앞에서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처럼 통일성 없는 고립된 생활은 견디기 어려운 감옥으로 변한다. 이러한 감옥으로부터 빠져나와 다른 사람들과 이런저런 형태로 접촉하지 않는다면, 미쳐 버릴 것이다.


이 세상을 나 혼자 살아간다고, 그렇게 착각하던 때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세상은 모두가 이어져 있는 것이더라고요.


먹는 것, 입는 것, 다른 모든 것들에 타인이 존재하고 있고 나 역시 그중 하나로 존재하고 있구나 하고 느꼈을 때,

세상 모든 것과 이어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모든 시대 모든 문화에 걸쳐 인간은 하나의 동일한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즉 어떻게 이 고립을 극복하며,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가? 또한 어떻게 하면 자신만의 동떨어진 생명을 초월하여 타인과 일체화될 수 있는가?


하지만 타인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개별의, 개인의, 각자의 존재로서, 타자로서 만나고 싶습니다.


자기 자신을 무엇보다 아끼면서, 사랑하는 무언가와, 누군가와, 그렇게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네요.

각자로 존재하면서.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야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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