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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금술 스토리텔러 Oct 14. 2022

호주와 뉴질랜드 여행을 마치고

국적을 초월한 세 여자의 댄스파티 

“우리말을 믿으세요!”

시드니에서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로 넘어와 미션을 마치고 마지막 행선지인 오클랜드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그곳에서 3명의 아름다운 한인 여성분들을 만났는데 그중에 한 분이 '키다리 아저씨'는 당신에게 특허권이 있다고 하셨다. 당신은 아주 오래전부터 키다리 아저씨의 팬으로 자주 즐겨 쓰는 호칭이라고 했다. 깜짝 놀랐다. 키다리 아저씨 덕분에 아주 짧은 시간에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식사 후 호텔 바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친구들을 만난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시드니에서 만났던 그 사람에 대해서 얘기를 살짝 해봤다. 사실 나는 그 사람이 나에게 했던 행동이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 외에 조금 과도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다른 한 분이 알려주셨다. 그것은 당신이 여자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의외의 대답에 내가 정말 여자로 보이냐 물으니 다들 여성스럽게 보인다고 했고 아름답다고 말해주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 반응을 하니, 그분들 이야기가 그동안 그런 칭찬을 못 들어봤냐고 했다. 글쎄 기억에 별로 없다고 했더니 “주변 사람들 참 나쁘다”며 자신들을 믿으라고 했다. 아름답다는 칭찬이 왜 그리 어색할까. 그리고 왜 믿어지지 않는 걸까;


'누가 뭐래, 괜히 지가 그러는 거지....'; 여성성을 부정하니 예쁘다는 소리도 모두 디스 시켰나 보다;

다섯 명의 오빠들 사이에서 자라서인지 은근히 남자들과 힘겨루기를 하며 살았다. 선머슴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남자 같아서 부담스럽다는 얘기는 달고 살았다. 우리 집에서는 여자를 천 대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아버지와 오빠들은 계집애라는 표현을 썼는데, 계집애를 공부시켜서 뭐하냐고 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 '여자'라고 부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곤 했다. 왠지 욕처럼 들렸다. 


나부터 나를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집안 남자들의 눈으로 나를 봤다. 그들의 눈에 나는 선머슴 같고 중요하지 않은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 그냥 수치심이 들었던 거다. 그리고 그대로 기억을 저장하고 단번에 아킬레스건으로 자격 상승시킨다. 그러나 바로 이런 부분은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하지만 난 그냥 다 믿어버렸다. 남들이 나에게 하는 말 모두를;

그런 성장배경 덕분에 나는 여성이지만 남성성인 아니무스가 더 강했다. 그래서 남들에게는 딱딱하고 거칠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남편은 그런 나의 태도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주눅이 든다고 했다. 그에게는 부드러운 여성이 필요했던 거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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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개떡 같은 가치 규칙 신념 때문에 원하는 것과 반대로 행동하는 모순적 태도를 보이며 살았다. 쌀쌀맞게 행동하면서도 착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갈망했다. 여성성을 억누른 채 살면서도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을 단 한 번도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왜 그렇게 엇나가기 시작했을까. 

그렇게 딸을 하대하는 집에서 자랐고 아버지로부터 따듯한 눈길 한번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 남편과 아버지를 동일시하는 착각은 아주 자주 일어났다. 특히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독심술적 오류가 주 특기였다. 의심하기 일쑤였다. 그러니 남편은 내가 어디가 예쁘다고 칭찬을 해주겠는가; 스스로 킥 미(Kick Me)하는 습관 덕분에 진심 담긴 칭찬을 받아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래서 더 유능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정말 정말 아주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내침당하지 않으려고 아니 더 솔직히 말해서 버림받지 않으려고 다방면에 유능한 사람이 되려고 무지막지하게 노력했었다; 어리석었다. 그런 상황일 때 겸허하게 정말 정직하게 듣고 싶은 말을 요청해도 될 텐데, 자존감이 낮은 나는 절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그것은 완전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믿었다. 그래서 오히려 상관없는 척 쿨한 척을 했다. 그러니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지각을 바탕으로 만든 신념의 벽이 얼마나 견고한지 모르겠다. 사회가치 규범, 가족의 신념을 걸러내지도 않은 채 그대로 흡수하여 만들어진 이상한 인격체; 내가 만든 신념의 부산물 에고의 껍데기에 쌓여 나를 잘 알지도 못했고 제대로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 엄마 그리고 주변의 중요한 사람들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살기에 바빴을 뿐이다. 세상 똑똑한 척은 다하고 살면서도 자기 꾀에 속고 사는 줄도 몰랐다; 



나의 해방을 돕는 지원군 천사들의 등장

즉석 동호회? 

오클랜드 숙소(에어 비앤비)에서 또 선물 같은 시간을 덤으로 얻었다. 주인장 '잭'과, 나보다 먼저 그곳에 도착한 오스트리아에서 온 '이사벨라'와는 처음 만난 그날 서로 통하고 말았다. 또래가 주는 묘한 동질감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모의 작당을 할 때의 느낌처럼 장난기를 발동시켰다. 잭은 오클랜드 대학에서 건축학 교수로 일하는 싱글여성이었다. 이사벨라는 오스트리아에서 온 치유 전문가였다. 그리고 나는 이제 막 담장 밖에 무엇이 있나 궁금해진 호기 심장이 여행자였다. 잭이 먼저 "제안을 했다. 우리 오늘 오후에 댄스파티해보면 어때?"라고. 나는 단지 촌스러운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아주 잘 노는 척을 했다. 드레스 코드 래나 뭐래나 입고 와야 된다고 했다. "앗싸! 잘되었네. 이때를 위함인가 보다"며 반색을 했다. 달링 하버에서 구입한 코랄 옷을 당당히 입고 참석을 했다. 두꺼운 팔뚝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그리고 우리는 국경도 초월하고 문화도 초월하고 가치관도 뛰어넘고 어린아이들처럼 신나게 춤추고 놀았다. 

이 역시 '키다리 아저씨'의 선물이 분명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그녀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이 여행의 동력이 되었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그녀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녀를 만나는 것이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거다. 그녀는 디딤돌이었을 뿐. 내 안에 이전에 내가 모르던 내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나의 해방을 위해서 키다리 아저씨가 나를 부른 것이었다. "얘야! 남이 중요한 게 아니다. 너부터 만나야 한다. 너 자신을 포기하지 마라. 네 안에도 빛나는 네가 있단다." "지금 남의 얼굴에 빛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숨겨진 빛을 꺼내어야 할 때인 것이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것 같았다. 


내가 우울한 기분으로 한국을 떠나올 때 내 영혼은 어둠에 있었다. 내가 만든 세상에서 나는 거절당하기 일쑤였고 남의 눈치를 보느라 불안했으며 센 척하느라 불쾌감을 주는 행동을 거침없이 했다. 그러니 남자들로부터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말 내가 남자들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곳 여행지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친절했고 호감을 표현했다. 



N 13 친밀감의 경로

생명나무에는 13번 경로가 있다. 그 경로의 이름은 '친밀감의 경로'이다. 벽장 속에 숨겨둔 해골을 꺼내는 시간이다. 어색함을 깨치고 거리감을 좁히고 일부러라도 연습해보는 구간이다. 


그렇다. 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친밀감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치유의 장으로 나가는 길이다. 이 여행은 바로 그 친밀감의 경로를 지나온 것 같다. 나와 친밀해지고, 내가 만난 사람들과도 친밀해지고 난생처음 만난 사람들과도 친밀해지고.  한 달 간의 여정은 완전히 나를 다시 태어나게 만들었다. 나는 상상할 수 없는 자리에서 강연도 세 번이나 했었고 수많은 분들을 만나기도 하면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나는 까칠하다 생각했는데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보지 않았다. 이 무슨 마법이 일어난 것인가. 


정말 키다리 아저씨는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이었다. 완전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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