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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르바나 Oct 01. 2020

하얀 추석秋夕-사막을 떠도는 순례자처럼

시와 현실 9 / 가슴으로 읽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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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추석秋夕-기청 시인




억새꽃 지천으로 날리는 

고향언덕 혼자 선 

미루나무 외롭더니

오늘 밤은 내가 미루나무 되어

바람에 윙윙 나부꼈다


이번 명절엔 고향에 오지 말거라

노모老母의 당부가 귀에 쟁쟁

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려

명절 때만 반짝 사람냄새

외로움은 뼈마디 끝에 저려오고


옛날엔 코로나*) 타고 

으쓱하며 달리던 고향 길

언젠가부터 뜸해지고

코로나 19로 멀어진 사람과

사람 사이가 잡초雜草만 무성해져

눈처럼 억새꽃이 날렸다


온라인으로 성묘를 하고

온라인으로 차례茶禮를 지내고

홈쇼핑에서 명절음식을 시켜먹고

배는 불러도 마음은 허기져서

사막을 떠도는 순례자처럼

백골白骨에 사무치는 긴 그림자여


사람냄새 그리운 중추절仲秋節은

초가지붕에 하얀 박덩이 덩실

동산에 떠오른 보름달 더덩실

천천히 오브랩 되는 

그리운 얼굴 얼굴들.


*)필자 주; 1960년대에 등장한 소형승용차, 

새한 코로나 택시



//////// 窓과 創 /////////////



중추가절, 천지자연의 베품에 감사를



▶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다. 

부담스럽다. 고향에 가느냐 마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만큼이나 절박한 현실이다.

필자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니 조금은

부담이 덜하다. 고향이라 해도 막내다보니 부모님은 이미 안계시고 형제들도

하나 들 떠나고 누나 한분만 요양병원에 누워 계시니---

고향은 변한다. 사람만 변하는 게 아니라 땅도 바뀌고 물길도 바뀐다.

행정구역 명칭은 수시로 바뀌고 지도도 변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은 추억 속 고향산천과 정겨운 얼굴들이다.

그들은 죽지도 않고 추억이란 영토에서 영생한다. 때로는 그리움으로

채색彩色을 하고 더욱 생생하게 살아난다.


▶추석 연휴기간을 아예 ‘특별 방역기간’으로 정해 시민들을 꼼짝 못하게 가두었다.

아무리 코로나 확산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 해도 불만의 목소리가 나올 수 맊에 없는 현실, “개인 생활에 지나치게 간섭한다.” “광화문 집회 원천금지조치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  전문가는 재난이 독재를 강화한다고 말한다. 재난을 핑계로 개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억압하면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 실제로 그런 조짐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광화문은 민의의 광장이다.  일부 보수단체의 집회금지를 위해 3중 차단 등 완전무결의 조치를 강구하는 것은 집회를 원천봉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방역에 지장이 없는 자동차 시위까지 봉쇄하는 것은 위헌적 과잉조치일 수 있다. 숨통을 막아서는 안 된다. 방역을 빌미로 정치적 계산을 따져서는 더욱 안 된다.


추석하면 떠오르는 초가지붕의 박, 보름달, 미루나무, 억새꽃 등 백색 이미지는 무엇을 말하는가?

백색 탈색 무채색은 비어있음 부재 상실감의 이미지다. 나아가 깊은 무의식에 내재하는 고향상실, 낙원상실 의식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고향에 대한 추억은 상실감으로 더욱 강화된다. 특히 어떤 이유로든  고향에 가지 못하는 것은 고통이며 물리적 정신적 상실의 아픔이다.    

필자의 시 <<하얀 추석>>에서 <오늘 밤은 내가 미루나무 되어/

바람에 윙윙 실컷 울었다> 미루나무/ 나의 전도顚倒는 서정적 자아의 고적함, 소외의 절박성을 말해준다.

<명절 때만 반짝 사람냄새/

외로움은 뼈마디 끝에 저려오고>는 

우리 농촌 현실의 절박성을 반영한다. 젊은이는 ‘꿀과 젖이 흐르는‘ 외지로 나가고 노인들만 고향집을 지킨다. 산업화가 낳은 이산가족의 비극, 나아가 문명시대의 욕망과 소외, 필연의 비극이다.

<온라인으로 성묘를 하고/

온라인으로 차례茶禮를 지내고/

홈쇼핑에서 명절음식을 시켜먹고/

배는 불러도 마음은 허기져서>는

물질의 풍요는 결코 정신의 충족에 값하지 못한다. 아무리 문명의 편리성이 강조되어도, ‘사람냄새’로 대변되는 휴머니티, 인간성을 뛰어 넘을 수 없다. 그 사람냄새는 곧 명절이고 추석이다. 그런데 반강제로 방역 때문에 가지 못하는 것은 시대의 비극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시대가 흘러도 변함없는 추억, 그 견고한 불변의 가치야말로 실향失鄕의

떠돌이에겐 무량 무한의 위로가 아닌가?


[글-기청(청사) 시인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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