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al Essay
(Social Essay)
오늘의 우리 세태를 단형 시조형식으로 풀어보았다. 참 어리석다. 너무도 명백한 이차를 우리는 깜빡 잊고 살아간다. 가을 단풍의 희생이 있어 새로운 봄을 맞게 되는 것이다. 달도 차면 기울고 기울어야 새 보름달이 생겨난다. 이런 자연의 이치가 곧 세상의 이치다. 그런데 인간의 탐욕은 그걸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정치판일수록 더욱 그렇다. 한 번 권력을 잡으면 끝없이 지속되길 원한다. 그런 집착은 결국 무리수를 낳고 불행한 결말을 가져온다. 요즘 한국 정치판을 뒤흔드는 법치 농단은 권력에 취한 오만하고 방자한, 일개 ‘선무당‘의 칼바람이 무리수를 불러온 때문이 아닌가?
이 한마디가 우리 정치현실을, 검찰농단의 실체적 진실을 가늠케 하는 명언이 되었다. 누구의 입에서 나온 말인가? 다름 아닌 농단의 본거지에서 신임하여 사건수사 책임자로 임명한 서울남부지검장 이다. 사건의 본말이 전도된 현실에 좌절, 자괴의 심정과 함께 진실을 용기 있게 밝혔다. 그의 입장문 중에서 마지막 부분이 인상적이다.
<법(法)은 ‘물(水) 흐르듯이(去)’ 사물의 이치나 순리에 따르는 것으로 거역해서는 안 됩니다. 검찰은 그렇게 법을 집행해야 합니다. 또한 국민들에게도 그렇게 보여 져야 합니다.>
그렇다 사물의 이치를 거슬러가려하니 무리수가 나온다, 그 나마 반듯한 철학을 가진 이들을 조직에서 떠나게 하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불행한 일이 아닌가?
윤 총장의 날선 작심 발언도 국민의 답답한 마음을 그나마 위로해주었다. 일부 태도를 문제 삼지만 그의 말대로 그가 당한 고초에 비하면 약과다. 검찰총장은 법무장관의 부하가 아니다. 부하라면 총장자리가 왜 필요한가? 그렇다. 헌법을 공부한 사람이면 기본상식에 속하는 법리해석이다. 민주주의의 원리는 헌법에 의한 삼권분립에 있고 검찰의 독립성을 인정하는데 있다. 검찰총장은 권력을 견제하는 보루로서 그 존재의미가 있다. 권력이 떳떳하고 국민을 위한 진정한 책임을 다한다면 검찰이 두려울 게 있겠나. 검찰총장을 미워하고 적으로 몰아붙일 이유가 있을까?
권력을 사유화하여 권력유지에 국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장관이란 방패막이를 앞세워 개혁이란 허울로 법치를 농락하고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몰이성적 ‘굿판‘을 벌일 이유도 없다.
공수처란 해괴한 옥상(屋上)옥도 필요가 없다. 검찰의 힘 빼기, 권력 비리 미궁으로 덮어버리기. 입법기관의 권력 주문형 법제조창으로 전락하는 불행도, 장기집권으로 결국은 독재의 심판이라는 오명(汚名)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권력의 비리를 눈감아주고 권력의 눈치나 살피는 그런 검찰은 국민에게 필요가 없다. 그런데 검찰을 권력의 말에 순종하는 충견(忠犬)이 되지 않는다하여 적으로 몰아붙이고 ‘찍어내기‘에 광분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반 헌법적 테러에 다름 아니다.
또한 법무장관이 특정수사에 총장을 배제하는 것도 위법 부당한 직권 남용 소지가 크다. 한 미디어에서 전 법무장관, 검찰총장을 대상으로 물은 결과 상당수가 위법 부당하고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라는 견해를 나타냈다. 직권남용죄는 미수처벌 규정이 없고 최대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는 중범죄에 해당한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이 실감난다. 명색 법조계출신의 장관이 법정신을 망각하고 법위에서 군림하는 어처구니없는 미증유의 사태를 저질렀다. 휘두르는 제 칼에 베인 꼴이다.
야당에서 고발하면 법적 판단이 나올 테지만, 문제는 법원이 소신껏 법리대로 판단하느냐가 관건이다,
울긋불긋 단풍이 세상을 취하게 한다. 그 불붙는 단풍의 의로운 단절(斷切)과 희생으로 땅은 더욱 비옥해지고 나무는 더욱 무성해질 것이다.
자연은 저리도 겸손하고 순한 마음으로 영원을 산다. 세상 단풍에도 취하고 감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홍시의 감동에도 눈시울을 적신다.
그럼에도 정치의 단풍은 절제가 없는 천박한 권력에 취하고 이전투구(泥田鬪狗)에 취해서 밤낮을 가리지 못한다. 부디 이성으로 돌아와 진정한 주인인 주권자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기를, 코로나의 위험에서, 다가 올 겨울, 독감에 걸리기도 전에 독감예방주사로 귀중한 국민의 생명이 더 이상 희생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