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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르바나 Jun 24. 2021

참회가 없는 시대의 부끄러움







[정치 에세이]




참회가 없는 시대의 부끄러움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부끄러움을 잊은 사회가 되었다. 후안무치(厚顔無恥), 얼굴 두꺼운 독버섯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 유례를 보면 권력의 후광(後光)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하나라 계(啓)왕의 아들 태강은 놀기를 좋아했다. 아버지 왕을 도와 정치를 돌보지 않고 사냥이나 즐겼다. 그러다 이웃 나라에 들어가 길을 잃고 붙잡혀 결국 비참하게 죽었다. 그의 다섯 형제들은 나라를 망친 형을 원망하며 번갈아 노래를 불렀다. 그중 막내가 부른 노래에는 참회의 고백이 담겨있다.


"만백성들은 우리를 원수라 하니 우린 장차 누굴 의지할꼬. 답답하고 서글프다. 이 마음, 낯이 뜨거워지고 부끄러워지는구나."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나 권력의 후광은 사람을 들뜨게 한다. 목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다보면 자신이 무한히 커지고 대상은 작아 보인다. 에고(자의식, 권위의식)가 강해지면 윤리나 양심이 꼬리를 감춘다. 이성의 견제를 받지 못하면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된다. 오만과 편견, 대립과 투쟁이 지배하는 혼란의 도가니가 된다.


지금 우리사회를 보라, 군림하는 군주와 그 후광을 받는 운동권 친위세력의 끝이 없는 후안무치, 편 가르기의 대립과 갈등, 나만 내편만, 내 몫 챙기기에 열광한다.


이 정권의, 후안무치의 상징이라 할 만한 조아무개의 오만과 위선, 대를 이은 법무라인의 횡포와 법치의 파괴는 아직 진행형이다.




권력과 그 후광이 후안무치(厚顔無恥)의 표본


그 장본인의 대선출마 선언의 역설-결정판


무차별 인사권-청1급 비서관에 25살 대학생


 


이런 극단적 후안무치의 결정판은 그 장본인, 전직 법무장관의 대권출마 선언이 아닌가? 귀를 의심케 한다. 그가 쏟아낸 말들이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분간이 안 간다.


정의롭고 공정 평등한 사회, 사람이 높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한다. 이럴 때 떠오르는 말은 유구무언, 뿐이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지금까지 정의 공정 평등을 짓밟은 자들이 누구인가? 지금까지 국민을 안하무인(眼下無人), 우습게 내려다보던 자들이 누구인가?


후안무치의 사례는 부지기수다. 그 중에 청의 막무가내식 인사권 행사는 고유의 성역이란 말로 정당화 될 수 있을까?


국회 청문회의 분노를 무시하고 입맛에 맞는 코드 장관 만들기, 청에서 잠시 근무한 코드를 국회에 심기, 사법부 수장과 요직 코드 심기, 가히 전천후 문어발식 코드심기는 오직 정권의 영속성을 위한 방패막이 작전에 불과하다.


 


최근에는 야당에서 젊은 당대표가 나오자 청의 1급 청년비서관에 25살 대학생을 내정했다고 한다. 행정 경험이 없는 자가 청년정책을 제대로 감당할까?


그러자 20-30대 청년층에서 반발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혹 떼려다 혹을 붙인 꼴이다. 이른바 맞불작전이라 해도 이건 지나치다. 고시 출신도 20년 이상 걸리는 고위직을, 눈 깜짝 할 새 만들어내는 권력의 인사권은 마법의 손인가?


 


권력의 아들 문예지원금 거액 지원 논란


공정 실력을 떠나 겸양지덕 염치의 문제


쥐꼬리 예산의 문화위, 기술쪽까지 떠맡아




근래에 왕자격인 권력의 아들이 문화예술 지원금 거액 6900만원을 지원받자 논란이 들끓고 있다.


“대통령 아들이면 어려운 이에게 양보해야지 다시 받다니 후안무치” 비난


“눈치 보지 말고 당당히 받아라 …아버지보다 멋지다” 지지자들 응원 댓글


예외 없이 이편 저편 갈라져 서로 삿대질을 한다.


당사자는 패이스북에 “축하받아야 할 일이고 자랑해도 될 일입니다만 혹 그렇지 않게 여기실 분이 있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미리 논란을 예상한 선제 방어벽을 쳤다.


문예위 측도 “ 7인의 심의위원이 심도 있는 토론을 거쳐서 심사한 것이라 외부에서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연막을 친다. 공정 실력도 좋지만 문제의 핵심은 다르다.


설령 문제가 있다 해도 외부에서 문제를 제기할 중거는 없다. 하지만 심사위원이 권력의 후광에 대한 부담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다는 증거도 없다.


 


핵심은 그런 행위가 도덕적 윤리적으로 몰고 올 파장이다. 공정 실력을 떠나 염치양심의 문제다. 나보다 더 어려운 예술인을 생각해서 겸손, 양보와 절제의 미덕이 아쉬운 것이다.


또 하나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문화위는 예술과 기술융합 지원사업 자체의 문제를 재고해야 한다. 가뜩이나 쥐꼬리 예산에 허덕이면서 왜 기술융합끼지 포함해서 27억 거액을 지원해야하나? 그러니 순수예술 지원이 더욱 위축되고 소외되는 것이다 기술관련 예산에서 공동 부담하던지 기술쪽으로 넘겨야 공정하지 않은가?


성찰이 없으니 부끄러움도 없다.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으니 염치도 수치도 없다.


목에 힘주는 자가 승자가 되는 시대, 권력과 그 후광이 독식하고 판치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어느 대권출마자의 변처럼 정의 공정 평등이 제대로 자리 잡는, 사람이 사람답게 양심과 염치를 회복하는, 부디 그런 날이 오기를.





(글 기청, 시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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