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에세이
[이슈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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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드러날 때, 사람들은 경악한다. 그리고 보복을 다짐한다.
카불공항, 탈레반을 피해 필사적인 탈출이 시작되었다. 죽음의 엑소더스,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극적인 대탈출이 줄을 잇고 있다. 그 소용돌이의 한복판, 카불의 한 호텔에서 폭파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인 10여 멍을 포함 90여명의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호텔에서 대기 중이던 미국인 장병과 아프칸 사람들은 이제 한 가닥 운명의 실오라기마저 무위(無爲)가 되었다. 무장 테러단체 ISIS-K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이 소식을 접한 바이든은 다짐했다. 울먹이면서 고통을 참았다. 그리고 연설에서 미국은 이들을 ‘용서 안할 것‘이라 말했다. 직접 피해를 당한 당사국의 책임자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다. 또한 어느 국가를 넘어 폭력은 인류 공동의 적이라는 관점에서도 용남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해법이 되지 못한다. 보복은 또 다른 피를 불러오는 악순환의 원인이 될 뿐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묵인할 것인가? 그것도 바른 해법이 못된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작용은 반작용을 부르는 것이 현상의 법칙이다. 현상은 선과 악의 끝없는 투쟁이며 영역싸움이다. 땅따먹기 놀이의 원리와 비슷하다. 내가 많이 차지하면 상대는 작아진다. 반대로 내가 조금 양보하면 상대는 누그러진다.
내가 더 많이 양보하면 상대는 고개를 숙인다. 더 이상 극단의 대립과 충돌을 피할 수 있다. 그런 분위기가 되면 평화의 비둘기가 날아오고 세상도 한결 밝아진다.
양보는 욕망을 더하는 방식에서 빼는 방식이다.
이런 원리의 실천이 인간에게는 왜 그리 어렵고 인색한 것인가?
성인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공자 붓다 예수--우리가 왜 그들을 성인이라 부르는가? 보통사람과는 다른 선택을 하고 실천하기 때문일 것이다.
간디는 비폭력 무소유 무저항 정신을 평생 실천했다. 그는 무소유 정신으로 자신을 비워냈다. 그러니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고 무서울 것이 없는 무적의 강자가 되었다.
지배자 대영제국이 힘으로 폭력으로 고통을 줄때도 저항하지 않았다. 더 큰 용서와 진정한 인류애로 오히려 그들을 품었다.
그 결과 대영제국, 그 무소불위의 권위도 힘없이 무너졌다. 작은 몸집에 비쩍 마르고 초라한 형색의 간디에게 진 대영제국이 스스로 물러났다.
예수는 ”오른쪽 뺨을 치면 왼편 뺨도 내어라“ 했다. 성난 자가 뺨을 치고 때리다가도 반응이 없으면 싱거워서 스스로 그 손을 내릴 것이다.
붓다는 자신을 죽이려 칼울 들고 쫓아오며 “멈추어라“고 외치는 앙골리마라에게 침착하게 말했다. “나는 이미 멈추었다” 이외의 반응에 살인자가 놀라 묻자 붓다가 답했다. “나는 욕망을 멈추고 살의(殺意)를 멈추고 모든 악의를 멈추었다.”
그러자 살인자는 무릎을 꿇고 제자 되기를 간청했다. 죽은 100명의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고자 했던 살인자는 99번 쩨에서 멈추고, 붓다의 제자가 되어 나중에 아라한이 되었다.
멈추는 것, 미움을 멈추고 저주를 멈추고 보복을 멈추는 것, 그 길이 피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오직 하나의 길이다.
그러자면 피나는 인욕(忍辱)과 자비로 참다움의 본성으로 돌아와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다음으로 깨어있는 이성의 힘으로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지도자의 능력이고 도량이다. 해법이 없는 난제는 없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세상은 영원한 악도 선도 없다. 영역다툼의 한심한 놀이를 반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