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산문7
[문학공간] 21. 11월호 원고
유치환 시인의 시세계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없는 범주의 다양성을 특징으로 한다. 일반적으로 그를 생명파 혹은 인생파란 라벨을 붙여 분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편의주의는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의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시인은 소속한 시대의 일원으로 마땅히 현실의 지배를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 본연의 자유와 순수의지는 어떤 제도나 관습으로도 억압할 수가 없다.
1930년대 암울한 시대상황과 맞물려 우리 시의 경향도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과의 충돌을 피해 자연 생명 혹은 내면으로 방향을 잡았다. 본질에 대한 향수와 생명탐구 정신의 발현(發現)이 그것이다.
유치환의 시풍은 초기에는 낭만적 상징적 경향의 허무주의를 표방했다. 후기에 오면서 범신론적 자연애를 바탕으로 동양적 허무의식의 추구와 극복의지를 보여준다.
유치환은 본원적 향수와 함께 인간적 연모와 플라토닉 러브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세인의 입에 회자(膾炙)되기도 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중략)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시 <행복>중에서
이 시(편지)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 이영도 시조시인이란 사실은 명백하다. 이 시인 자신이 나중에 (유치환 시인 사후에}그에게서 받은 수많은 편지를 묶어 책으로 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하나의 의문을 갖게 된다. 한 여인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집요할 수 있을까? 그들의 사연은 마치 한편의 연극무대처럼 드라마틱하다. 처음 통영여중에서 교사로 둘이 만났다. 남편과 사별한 30대 중반의 꽃다운 여인과 열정의 유부남 시인과의 만남, 그렇게 운명처럼 시작되었다.
이후 유치환이 먼저 부산으로 이주하자 이영도가 따라왔다. 두 사람은 물리적으로 멀지않은 곳에서 살았다. 그런데도 무려 5천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니. 그들은 서로 연모하면서도 함께 할 수 없는 ‘굴레‘ 때문에 괴로워했을 것이다.
유치환은 편지의 대상을 인물 그 자체에만 국한하지 않았다고 보아진다. 그가 애타게 흠모하는 본질에의 향수가 그런 순수 애련 정절의 표상(여인)에게 감정투사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좀 더 전문적인 심층심리학의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깃발> 전문
*출전; <조선문단 19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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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교육자 통영시 출생, 호 청마(靑馬)
극작가 유치진의 동생,
동래고 졸업, 연희전문 문과 수학
1931[문예월간]에 시 <정적(靜寂)>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1939년 첫 시집 <청마 시초> 간행, 경남여고 등 교장 역임
이후 시집으로 <생명의 서(書)> <울릉도> <청령일기>
한국시인협회 회장(1957), 초대 예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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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아이러니는 근원적 모순에 대한 애상
시 <깃발>은 유치환 시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이다. 본질(초월적 세계)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 좌절을 통해 근원적 물음을 던진다.
시의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다. 깃대(이념의 푯대)에 매달려 나부끼는 ‘깃발‘을 통해
그리움의 실체를 구체화한다. 진술대신 다양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효과를 내고 있다. 또 '푸른 해원’(이상)과 ‘하얀 깃발‘(현실)의 대조적 색채 이미지는 보다 선명한 대비효과를 거둔다.
보조관념인 ‘아우성’ ‘손수건’ ‘순정’ ‘애수’의 확장은유는 시적화자가 추구하는 세계의 속성을 드러낸다. ‘아우성‘은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막연한 그리움, ’손수건‘은 이상에 다가가고자하는 강열한 의지를 나타낸다. ‘애수‘는 도달할 수 없는 절망과 허무의식이 깊게 묻어난다.
시의 후반부(7-9행)에 와서 ‘깃대’에 묶여있는 현실의 한계를 절감하고 모순을 탄식원망 자조 형식의 물음을 던진다.
이 시의 주조(主調)인 낭만적 아이러니는 근원적 모순에 대한 애상이다. 유한한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세계의 동경은 필연적으로 한계를 확인하는 덧없는 과정이다. 그럼에도 ‘깃발’의 강렬한 의지는 멈출 수가 없다. 이상(본질)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나부끼고 결국은 무너지는 현상의 그 너머엔 불멸(不滅)의 영원이 존재하리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어렴풋이나마 존재를 드러내는 ‘손수건’이 함성처럼 손짓하며 다가오라하기 때문인 것이다. 시의 지향은 끈질긴 구도(求道)의 과정 그것인지 모른다,
이 시에 드러난 그리움의 원천인 연모의 정은 대상에 한계가 없다. 이상이나 본질의 절대세계를 지향하지만 현상계의 어떤 상징에 대해 감정이입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순수와 천진성과 선 지향(善志向)의 본성에 가까운 것이다.
이런 품성을 갖춘 연모의 대상이라면 사람이나 동물인 유정물(有情物), 나아가 무정물까지도 가능한 범주에 드는 것이다. 이런 심충심리학의 관점, 열린 시각으로 보면 단순히 한 여인과의 사랑을 넘어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구애와 그리움의 연장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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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분명히 우리의 생명을 보전해주는 중요한 인자(因子)를 가졌다. 어쩌면 천의 얼굴로 지구의 존재와 함께 출렁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찍이 가스통 바슐라르는 ‘아침의 물은 모든 것이 새롭다. 저 카멜레온 같은 강은 무슨 정기를 지녔기에 젊은 빛의 만화경에게 금방 화답을 하는가. 파르르 떨리는 물의 생명만이 모든 꽃은 새롭게 만든다. 은밀한 물의 가벼운 한 가닥 떨림도 꽃의 아름다움이 터지는 도화선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물의 정체는 ‘천태만상의 반전’으로 다가온다.
물은 웃음이다가, 폭력이다가, 한 음절 선율이다가 다시 평온한 정체로 ‘내 온몸을 관류하는 생명수로 발현되고 있다. 물에 관한 상징이나 비유는 무한으로 생성한다. 물이 던져주는 이미지 또한 무궁무진하다. 프랑스의 소설가 생텍쥐베리는 물에 대해서 ‘네 은혜로 우리 안에 말라 붙었던 마음의 모든 샘들이 다시 솟아난다’는 명언이 새롭기만 하다.
한국문인협회 사무처장, 시분과 회장, 평생교육원 교수 역임
현, 한국문인협회 수석 부이사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