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에 읽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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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삼 선배님, 언젠가 충무로 주점에서
이형기 시인과 만나 고향의 막걸리 한잔으로
갈증을 풀던 그때가 문득 생각나네요
선배님도 어지간히 말을 아끼는 분이셨지만
오늘 입춘 날에 시 <無言으로 오는 봄>을 읽으니 새삼
숙연해집니다.
어쩌면 오늘의 세태를 자연에 빗대어 이렇게
감동으로 표현하시는지-
말의 홍수로 왁자지껄한 세상, 이 난해한 오늘의 세태를,
어제 대선후보 토론회는 나 잘난 말 잔치로 끝났지만
그 말을 굴리는 혀가 심장이 마음태의 뿌리가
거짓에 연결된 것인지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인지
자신들 스스로는 알기나 할까요?
어제도 여전히 ‘대장동 진실‘은 겉돌고 그 몸통으로 지목 받는 자가
‘진실은 언젠가 밝혀질 것‘이라 하네요
자신의 운명을 무의식으로 예견하는 건지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어리둥절할 뿐
그들의 유체이탈 화법은 여전히 이 땅의 봄을
가로막는 데, 한 줌 햇살이 구석구석
남은 눈과 얼음을 녹여
낡고 허물어진 것, 말로만 세상을
하루아침에 파라다이스로 만들겠다는 정치인
그들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진정 이 땅에 생명의 봄은 올 것인지,
재삼 선배님, 재삼 불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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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李想, 본명 김해경)이란 이상한 시인, 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우리 현대시문학 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문제의식을 던진 시인이기도 하다.
비록 27세에 요절했지만 문학적으로는 가장 오랜 시간동안 논쟁의 중심에 자리하는 최장수 시인이다. 그의 시는 모더니즘 계열의 초현실주의 시로 분류하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이질적 특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그의 작품세계와 함께 그의 호기심어린 기행(奇行)의 삶이 신비주의의 베일에 덮이기도 했다. 이상이 병상에 누워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 ‘레먼’ 향기를 맡으며 생을 마감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80년대 중반) 그의 아내였던 변동림(수필가, 필명 김향안) 여사에 의해 ‘멜런‘(서양참외)으로 밝혀지면서 신비주의 베일이 한풀 벗겨지는 혼란을 겪기도 했다. 이 증언은 단순한 일과성을 넘어 수많은 논문의 오류를 수정해야하는 파동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상의 작품에 관한 석 박사 및 일반 연구논문은 약200여 편에 이른다.
이들 중 많은 논문에서 ‘레먼‘ 향기를 이상의 ’자의식의 마지막 도달점‘으로 상징의미를 부여한 때문이다. 성급한 신비주의 해석의 치부를 드러낸 것이다.
특히 제목에까지 드러내어 난감해진 논문도 적지 않았다.『레먼에 도달한 길-이상연구』(김구용), 『레먼과 실존의 발견』(임중빈), 『이상의 죽음-레먼이 있는 종생극』(김승희)등의 논문이 대표적이다. 게다가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이상론>에서
자의식(自意識)이 선과 악의 냄새라면 레먼의 향기란 ‘마음에 간직한 영원한 동경’이라고 해석했다.
물론 현실에서 레먼과 멜런의 차이가 본질적으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미세한 정서를 다루는 문학의 관점에서는, 둘을 동일시 할 수 없는 뉘앙스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레먼은 후각심상(향기)을 멜런은 미각심상(맛)을 자극한다. 그렇게 볼 때 ‘멜런‘은 죽음에 직면한 고통을 건너 안락의 영원에 이르고자하는 일종의 정신적 통과의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실제로 아내가 멜런을 구해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평온한 상태로 생을 마감한 뒤여서 그런 추론을 뒷받침 해준다.
(출전; 조선중앙일보(34.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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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李箱, 1910년 9월 ~ 1937년 4월 )
본명; 김해경(金海卿 시인 소설가 건축가
1929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
첫 장편소설 <12월 12일> 조선 지에 필명 이상으로 발표
1931 시 <이상한 가역반응> 외 발표
1933 객혈로 총독부 기수직 사임
1934 구인회 가입. 본격 작품활동 시작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 시 제1-15호 연재 후 중단
1937 사상불온혐의로 일경에 유치 후 출감
동년 4.17일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객사
1939 이상 전집 2권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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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까마귀의 눈으로 부조리한 현실세계 고발마귀의 눈으로 부조리한 현실세계 고발
신문에 이상의 <오감도>가 연재되자 어리둥절한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우선 맞춤법 띄어쓰기 등 표기법이 무시되고 시를 모르는 독자에게 난해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연재는 15편으로 중단되고 시를 통한 독자 대중과의 소통도 단절이 되는 아픔을 맛보게 되었다. 이런 당혹과 충격을 통해 이상은 현실세계와 추구하는 정신세계와의 괴리가 얼마나 크고 깊은가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오감도’(시 제1호)는 우선 제목에서부터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왜 조감도가 이닌 오감도 인가? 이상이 건축공학도 출신이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익숙한 소재다. 하지만 새조(鳥)대신 까마귀 오(烏)인지 어리둥절하다. 조판 당시의 일화를 보면 문선공이 ‘鳥‘자를 뽑아서 보내면 교정부에서 다시 ’烏’자로 고치는 등 해프님이 벌어졌다고 한다.
제목에 대해 이상 문학연구의 대가인 비평가 이어령은 “까미귀와 같은 눈으로 지상의 인간군상을 굽어본다는 의미이며 암울하고 불길한 시적 분위기를 나타내는 의도”라고 분석한다. 이는 관찰자의 시점으로 높은 곳(본질)에서 눈 아래(현상계)를 바라보는 형식의 구도이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조로 추앙받는 남미현대문학의 거장 보르헤스(1899∼1986)의 작품구조와 그 맥락이 닿아있다. 아르헨티나 출신 시인 소설가로 주목받으면서 유럽으로 건너가 아방가르드(전위예술)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일찍이 의식의 깨어남을 통해 견성(見性)을 이룬 영성가 이기도 하다. 보르헤스의 작품도 본질의 바탕에서 현상계를 내려다보는 형식의 구도를 취한다. 그래서 독자에게 그의 시는 낯설고 난해했지만 남미 특유의 환상적 리얼리즘 문학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상과 동시대의 인물로 일부 작품경향의 연관성은 우연만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결국 13인의 ‘아해‘(아이)는 막다른 골목에 서 있고 도로를 질주한다. 13인의 아해가 모두 무섭다고 한다. ‘무서운 아이’와 ‘무서워하는 아이’로 나눈다.
이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13인의 아해는 자아의 분신으로 봄이 타당하다. 따라서 내면(id, 무의식)의 무서운 아이나 무서워하는 아이는 현실적 자아(ego)에서는 분신으로 모두 공포를 느끼지만 초현실(super ego)에서는 관찰자로 분리된다. 에고의 자아는 ‘고통스러운 나‘이지만 초현실에서는 그런 나를 바라보는 ’관찰자로서의 나‘이다.
그러면 자아의 분신인 13인의 아해가 갖는 무서움(공포)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 단서로 ‘막다른 골목‘과 구체적인 행위로서의 ’질주‘가 있다. 그 반대 상황은 ‘뚫린 골목’과 ‘질주하지 않음’이 있다. 단절이란 원인이 사라진 뚫림 혹은 열림의 상황변화가 비로소 13인 아해를 안심시키고 평온을 가져온다.
그러면 현실에서 그 막힘(공포감)의 실체는 무엇일까?
비평가 김윤식교수는 “이상 문학의 원점에는 결핵에 의한 죽음의 공포가 놓여 있다고 지적된다. 즉 그는 다가올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절망 속에서 글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글쓰기는 이러한 죽음의 공포를 필사적으로 극복하려는 정신적 노동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이에 민족이 처한 절망의 시대현실은 지식인으로서 더욱 참기 어려운 고통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시 오감도는 관찰자의 눈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한다. 기존의 익숙한 시학을 거부하고 낯설게 보여주기를 시도한다. 낡은 가치와 인습에 대한 조롱과 통절한 비판을 분열된 자아를 통해 역설적 상황으로 제시한다. 지루한 반복과 열거로 공포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강조한다.
평론가 이어령은 “이상에 의해 한국시는 표현이 아니라 관찰이 되었고, 느낌의 방식이 아니라 인식의 양상으로 바뀐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상을 ‘박제가 된 천재’라 한다면 가당치않은 수사(修辭)이자 모독이다. 이상은 살아있는 한국 지성의 파수꾼이다. 이상 문학은 독자 대중에게 읽히는 명작이 아니어도 문제작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시문학사에 빛을 발하고 있다. 열기가 식어가는 한국 현대시의 분화구에 식지 않는 마그마로,
새로운 역동적 분출의 에너지로 솟구치길 염원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