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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르바나 Mar 12. 2022

시가 있는 산문9-오세영

문학공간 22. 1월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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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가 있는 산문 9 / 그릇 1 (오세영)

시가 있는 산문 9-그릇1 (오세영)


기청 (시인 문예비평가)


오세영 시인, 그는 시인으로 문학평론가로 대학의 연구자로 살면서 23권의 시집을 낸 원로 시인이다. 그의 이력을 보아도 그는 시와 함께 살아온 숙명의 시인인지 모른다. 그러면서 시를 중심으로 이론과 비평, 학문이라는 입체적 관점의 식견을 통해 균형있는 시문학 발전에 기여한 업적을 평가받고 있다. 시가 밥이 되지 않는 시대, 하지만 강단에서 시와 문학으로 밥을 해결하는 절묘한 생존방식을 통해 고난의 한국문단에 우뚝 서게 된 시의 거인이다.

"시는 깨달음의 문제지요. 사물을 보면, 명상하면 불현듯 깨달음이 옵니다. 사물이 내게 이야기를 해주죠. 이념이나 사상을 전하려는 도구가 아니라 사물 자체에서 감화된 인식을 전하는 거랄까."


2016년 23권 째 시집을 낸 후 미디어에 인터뷰하면서 던진 말이다. 시를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으로 인식한다. 시의 대상이 되는 현상이나 사물에서 깊은 통찰을 거치면 깨달음의 진라와 만난다는 것이다. 한국시가 나아가야할 어떤 방향을 제시하듯, 의미심장한 화두를 던진다. 아직도 사물의 겉모습에 천착하는 표피적 감상적 서정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시를 형상화하는 기법으로 보아 크게 ‘느낌의 시‘와 ’인식의 시‘로 나뉜다. 전자는 표현의 방식에 의존하며 감상과 이미지 중심으로 전개된다. 후자는 깊은 통찰에 의해 지적 형이상학적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사물에서 인간의 삶을 유추하고 크게는 자연과 우주의 세계관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오세영 시인은 한때 ‘그릇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릇이란 어쩌면 단순한 사물을 통해, 그 속에서 은밀히 발아(發芽)하는 생명성과 역동적으로 생멸(生滅)하는 인간의 삶을 환유(換喩)하는 인식적 창조의 힘을 발견하는 것이다.

사물이 시가 되는 인식의 과정은 그의 시 ‘질그릇’에서도 빛을 발한다.

<질그릇 하나 부서지고 있다./ 질그릇의 밑바닥에 잠긴 바다가/ 조용히 부서지고 있다. / 스스로 부서져 흙이 되는/ 저 흔들리는 바다./ 질그릇에 담긴 生鮮의 뼈,/ 질그릇에 담긴 暴風,/ 질그릇에 담긴 空間,/ 그 空間 하나 스스로 부서지고 있다.// >-‘질그릇’ 전문

투박하고 빛나지 않는, 그저 꾸밈없이 형태만 갖춘 우리의 ‘질그릇’에서 그 안에 담긴 ‘바다‘의 크고 넓은 공간의식, ’생선‘ ’생선뼈‘의 생명성과 무상, ’폭풍’의 위력 역동성, ‘스스로 부서져 흙이 되는’의 허무의식, 혹은 생멸 그 너머 내재된 자연 순환의 이치를 발견한다. 한갓 죽은 사물인 질그릇에서 이처럼 크고 넓은 세계를 끄집어내는 시의 통찰이 놀랍지 않은가?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그릇 1 >전문


출전; 시집 <모순의 흙> (1985)



시인 오세영(吳世榮 (1942.- )


42년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출생,

인간 존재의 실존적 고뇌를 서정적·철학적으로 노래하는 원로시인이자 교육자

68년《현대문학>에 시 《잠깨는 추상>이 박목월(朴木月)에 의해 추천되어 등단

70년 첫 시집 《반란하는 빛> 출간 후 <모순의 흙》《무명연시》 《불타는 물》등 지금까지 23권의 시집과 

<한국낭만주의 시 연구》《20세기 한국시 연구》《상상력과 논리》)등 평론집 산문집 다수 출간.

정지용문학상(1992), 공초문학상(1999), 만해문학상(2000) 등 수상.

65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 대학 대학원 석사, 문학박사

85년부터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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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와 균형의 동양적 미덕, 그 너머의 현실 조명

부당한 힘에 맞서는 무저항의 저항정신 담아


앞서 소개한 시 ‘질그릇’이 사물을 통한 존재의 본질을 궁구한다면 ‘그릇 1’은 현상으로서의 어긋남과 일탈을 노래한 것이다.

첫 행의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와 마지막 행의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로 수미상관(首尾相關)의 균형과 반복을 통한 강조의 의미가 부각된다. ‘칼’(일탈, 위험한 존재)의 의미 맥락의 대조는 ’절제와 균형‘이다.

이렇게 보면 ‘그릇‘이라는 질서와 안정이 깨진 상태가 되면 ’빗나간 힘‘(부정적)이 되고 그것은 불안하고 위험한 존재가 된다. ’부서진 원‘은 일탈이 되어 ’모‘(저항)를 세우지만 동시에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는 각성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본질에서 갈라진 이중성, 현상의 이원적 세계인 대립과 갈등의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맹목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에서 획일적이고 조작된 이념이나 규율을 강요받는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한다.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에서 ‘맨발’ ‘살’은 이런 부당한 힘에 맞서는 ‘무저항의 저항정신‘이 드러난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에 와서 이 시의 중심의미가 드러난다. 시상의 전환을 통한 가치의 승화를 가져온다. 결미에서 다시 반복을 통한 강조로 시의 울림을 증폭시킨다.

사물에서 모순을 발견하고 그 모순의 지점에서 인간과 현실을 조망한다. 오세영 시인의 독특한 인식의 시학인 것이다.

이 시는 절제와 균형의 미덕이라는 동양적 중용의 가치를 존중한다. 하지만 그의 독특한 모순어법은 오히려 그 너머에 있는 현실의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지적 철학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시의 지평을 열어 보인다.


그는 "존재의 본질은 모순에 있다"는 통찰, "풀 수 없는 모순을 초월하는 위대한 진실이 나를 매혹시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세영 시의 뿌리는 삶의 허무와 맞닿아 있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어서 나는 시로써 영원을 탐구하는데, 사실 현실적으로 영원은 없고 관념적일 뿐"이라는 그는 "허무와 영원의 딜레마가 나의 풀지 못한 숙제"라고 말한다.

현상계의 무상(無常)은 허무로 귀결될 수 있지만 그것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의 단면만 본 것이다. 진리의 세계는 다시 공즉시색(空卽是色)으로 돌아오고 이런 연기(緣起)의 연속체계가 짝이 되어 영속 불멸의 영원으로 통한다.


오세영 시의 강점은 평범한 사물에서 깊은 통찰을 통해 비범한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진정한 탐구정신에 있다. 그의 시가 한국시의 길을 알려주고 원숙의 전형을 보여주길, 독자에게 언제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길 소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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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편의 시]


멀리 가는 울음

―김창균(1966~ )


바늘이 쏟아질 듯한 전나무 숲을 딛고 와서

아니 바늘의 그늘을 겨우 딛고 와서

마침내 서보는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앞

한 층 더

한 층 더

당신의 모든 간절함 위에 딱 한 층 더

낮달 슬쩍 얹어놓고 가는 바람

종을 때리고 가다

끝내 자신도 울고야 마는 바람 배웅하며

손끝이 떨리는

문수, 문수보살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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