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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르바나 Mar 19. 2022

나의 삶 나의 문학- 특집 한국시학 22봄호

[문예 22  신간 리뷰 ]

한국시학 22 봄호 통권 61호 



계간 한국시학 22 봄호(통권 61호) 출간

풍성한 읽을 거리, 봄의 향기가 물씬 


계간 한국시학 22 봄호(통권 61호) 출

새봄과 함께 봄의 글 향기를 전하는 계간 문에지 [한국시학](발행인 임병호 편집주간

임애월)  봄호가 출간되었다. 독자를 향한 무언의 약속이 지켜진 것이다.

낯설고 아픈 비현실이 점차 일상화되고 있는 언텍트 시대의 한 가닥 희망,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고 따뜻한 공감과 위로를 전하는 문학의 향연-

두텁고 견고한 겨울의 껍질을 벗고 나와 생명과 생명의 기쁨을 노래하는 것이다.

이 번호에는 <봄, 시 한편 읽기>강성애 시인의 '아무 생각 안 하기는 어떻게 하나?'가

맨 첫머리에 소개되었다.


<아프고 있을 때/너는 아무 생각 말고 푹/ 쉬어야 낫는다

그래야 한다며 조언한다/ 이제부터 아무 생각 안 하기를 생각한다>

그렇다 현실의 번뇌를 잊어버리기 위해서, 안락과 평화를 위해서 우리는 생각을 멈추는 

일이 필요해 보인다. 요즘처럼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한국시학이 주목하는 이 계절의 시인>은 문정영 시인과의 이메일 대담, 

'만나고 싶었습니다'가 임애월 주간과의 문답 형식으로 소개 되었다. 

<윤석산 교수의 '화자시학 강의실> 연재와 <이 게절의 시1>에

박송죽 박제천 민윤기 시인의 신작시와 이해인 수녀시인의 ' 어느날의 일기'와 

허형만 강영환 강정화 시인, 박종해의 '꽃 소식' 김송배 시인의 연작 '주유시담'

등 비중 있는 시인들의 생동감 넘치는 신작들이 실려있다. 

그 외 <한국시학 소시집>정겸 시인의 '별이 된 기억들'외 5편과 <이 계절의 시2>에

강한석 송유나 조경주 정영주 등 시인들의 신작도 문향을 더해준다.(*)


이 밖에 특집으로 필자의 <나의 삶, 나의 문학>이 소개되었다. 지나온 생애와 45년 간의

문단 활동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특집은 <오프로드의 삶-자유 열린 세계로의 탐험>과 ,<나의 문학적 여정><남은 과제, 정화와

영성으로 가는 여정>의 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화보>와 기청 시인 <연보>,<자선 대표작 5편>으로

엮어져 있다. (*)     글-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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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따갑고 막막한 여정이었다. 새파란 20대말 청춘에서 문학과

운명적으로 동행하였고 이제 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를 넘겼으니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는 일조차 허망하다.  잠시 길을 잃고 무상(無常)의 꿈속을 헤맨 것인가?

'나의 삶과 문학적 여정'에 귀한 지면을 할애해준 [한국시학]에 감사하며 기왕 세상에 

소개된 글이니 본 <브런치 불로그>에 2회에 걸쳐 싣기로 한다. (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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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학 22봄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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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문학

오프로드의 삶-자유, 열린 세계로의 탐험

-기청 (시인 문예비평가)


등단시절/

내 영혼의 대장간, ‘가고파‘의 고장에서


그해 정월은 세상이 모두 내 것 인양 설렘과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아직 매서운 추위가 남아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따뜻한 봄날의 햇살처럼 맑고 빛났다.

잉크냄새가 풍기는 조간신문을 받아들고 내 이름을 확인했다. 신춘문예 당선자 명단에 내 필명과 본명이 찍혀있었다. 기적처럼. 물론 그 며칠 전에 동아일보 편집국장 명의의 당선 통지서(전보)를 받았지만 믿기지 않았다. 이제야 비로소 내 양 어깨에 견고한 날개를 달게 된 것인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나니 파란 하늘이 더 낮게 다가온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등단시절,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는 먼 여행을 떠나는, 그런 기분이랄까. 당선작은 시조 <나의 춤>이고 필명은 정시운 이었다. 당선작은 전 2수로 된 비교적 짧은 형식이었다. 보통 당선작이라면 3수 이상의 비중 있는 작품인 경우가 많은 것에 비하면 이례적이다. 거기에다 관점의 이채로움이 눈길을 끌었다.

<저 비경(秘境) 수풀 속을/ 알몸으로 헤쳐 온 바람/ 끊긴 현(玄)의 떨리는 선율 위/ 몇 점 비늘로 파닥이다가/ 창살 끝 아픈 비명을 딛고/ 더덩실 춤을 춘다//

-<나의 춤>첫수애서


현대시조의 경우 일반적으로 구상(具象)에서 추상으로 의미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구체적 대상에서 그 이미지와 숨은 의미를 끌어내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백자’란 대상에서 그 순수 이미지를, 그리고 한국적 미의식(美意識) 혹은 장인정신을 이끌어내는 방식이다.

하지만 <나의 춤>의 관점은 좀 다르다. 역으로 삶이란 추상을 ‘춤‘이란 구상(具象) 이미지로 환치(還置)하여 파생적 이미지(바람 현 비늘 창살 끝)를 표출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삶은 무대 위 춤꾼의 춤처럼 화려하지만 위태하고 불안한 것이다. 당시 29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삶의 무상(無常)을, 시조의 율격에 실어 노래한 것이다.


심사를 맡은 초정 김상옥 선생의 예리한 혜안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초정은 시조를 스스로 삼행시라 불렀다. 비록 시조의 틀은 오래된 것이지만 그 정신은 새롭고 참신해야 한다는 그의 지론이 숨어있는 것이다. 발상과 기법이 기존의 답습이 아닌 새로운 시도가 보인다는 것이 당선작으로 뽑은 이유인줄 한참 뒤에야 눈치 챌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가고파’의 고향 마산은 나의 설익은 예술혼을 불에 달구고 물에 식혀서 무수히 담금질을 해준 영혼의 대장간이었다.

등단 이후 자연스레 마산 경남의 문인들과 자주 어울리고 교류의 폭이 점점 확장되었다. 인접 예술장르인 화가 음악가 서예가 도예가 무용인들과도 자주 교류했다.


마산의 번화가 창동에서 매월 ‘시와 독자의 만남’ 행사가 열렸다. 조촐하지만 회원들의 회비로 만드는 자리라 그만큼 의미도 컸다.

오하룡 시인이 주도하고 임신행 홍진기 정목일 이우걸 시인과 필자 등이 함께했다. 위로는 원로시인 정진업, 중진 이광석 이중 박재호 제씨가 문단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당시 은사인 수필가 신상철 교수(경남대 교수 문과대학장)는 고교의 국어교사, 대학원 지도교수로 만나 나의 든든한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주었다. 용마고교 문예반에서 활동하면서 교지에 생애 첫 단편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마산교대 교수인 정순영 시인과도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눈 것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이들은 마산 문화예술의 현장을 이끄는 주도적 인물이었다. 나는 나이가 적었지만 때로 가족 같은 친밀감으로 문단 선배들과 어울려 토론하고 함께 고민하는, 가교역할을 했다


주변 예술인과 폭넓은 교류를 한 인연으로 당시 마산의 명소인 번화가 창동의 한성 다방에서 시화전을 두 차례 열 수 있었다.

가까운 화가 서에가 도예가의 도움을 받아 복합예술과 시가 어우러진 이색적인 시화전으로 회자되었다. 이곳에서 첫 시집 <풍란을 곁에 두고> 출판기념식이 열렸고 이 자리에 후배 성악가의 가곡 ‘명태’가 열창되어 분위기를 빛내주기도 했다. 작곡가 김봉천 씨와 자주 어울리면서 ‘바라’ 까치‘등 가곡의 작사를 맡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 라디오를 통해 이 곡이 흘러나오면 그때의 추억을 떠 울린다.

자주 어울린 화가로는 ’게 그림’의 대가 최운 화백이 생각난다. 머리가 허옇게 센 백발의 노 화백이다. 최 화백은 또래인 원로 정진업 시인과는 절친 이면서 술자리에서 때로는 앙숙이었다. 거나해지면 서로 티격태격하기도 하다가 술잔을 쨍 부딪치기도 했다. 월초 정진업 시인의 가곡솜씨는 일품이었다.


날이 거뭇해지는 저녁 무렵 나비넥타이를 매고 가포바다를 배경으로 ‘오 솔레미오’를 열창하던 모습이 아직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의 노래는 삶의 시름을 정화시키는 일종의 의식이었고 고독한 아나키스트의 우수에 찬 페이소스였다.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의 뒷모습이 아리도록 쓸쓸해 보였다.

점차 활동범위가 넓어지면서 예총의 간사로, 마산 문협의 사무국장, 창원문인협회 초대 부지부장을 맡기도 하고 경남도사(道史)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80년대 말, 예기치 않은 위기의 시간이 찾아왔다. 열정과 넘침의 축제가 끝나고 혼돈과 좌절의 회오리가 불어닥쳤다, 함몰되어 버린 자아, 일찍 추수가 끝난 황량한 땅에 껍데기만 남은 허수아비가 되어 찬바람 부는 허허 벌판에 서 있었다.

나는 서둘러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는 스스로 자발적인 유배를 결행한 것이다.


수많은 인연과 교류하던, 영욕(榮辱)의 무대가 되어준 고향을 떠나오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정말 그랬다. 하지만 30년도 더 흐른 지금, 나는 추억 속의 고향에서, 나이를 잊은 그분들의 열정과 훈훈한 정감에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

나의 자발적 유배지가 된 곳이 하필이면 팔도의 강(유랑민)이 썪여 흐르는 수도 서울이었다, 80년대 말에서 10년간은 나의 문학적 휴면기 였다. 살아남기 휘해 오직 생존에 급급한, 혹독한 시련기 였다.

시간이 나면 남산을 자주 찾았다. 그때만 해도 봄이면 진달래 피고 뻐꾸기가 울고 늦은 밤이면 부엉이소리가 들리는, 정서적인 고향의 냄새가 어렴풋이 남이 있어 좋았다. 길 잃은 40대 중반의 낯선 이방인이 찾아와도 남산은 늘 어머니처럼 포근하게 품어주었다. 서울이 내려다보이는 남산 도서관에서 동국대(장충공원)에 이르는 산책길은 호젓하고 낭만적이었다. 숱한 빛깔의 꿈들이 모여 사는 이 격랑의 바다에서 나는 또 어떤 빛깔의 꿈을 채색하며 뿌리를 내릴 것인가?


아침 출근길에 한강을 건너 여의도의 독서신문 사옥에서 하루를 보낸다. 저녁에 다시 한강을 건너온다. 한때 30만부를 찍는 국내 유일의 교양신문이었다. 편집장을 맡아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주간지라 일이 만만치 않았다. 기획특집으로 원로 문인들의 자선 대표작을 비중 있게 다룬 일이 기억에 남는다.

직접 사진기자와 자택에 가서 대담하고 정리하여 전면에 실었다. 지난 날 소설 <자유부인>으로 화제가 되었던 소설가 정비석, 문화부 장관을 지낸 시인 정한모, 그림 전각 서예 골동품 등 종합예술의 달인 시조시인 초정 김상옥, 연극 <산불>의 극작가 차범석, 동시인 윤석중 등 문단의 별들을 직접 만나 대표작에 얽힌 에피소드와 그분들의 치열한 예술정신을 읽을 수 있는 값진 시간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서울 살이는 문학적 휴면기를 거쳐 후기 정착기를 맞게 된다.


나의 문학적 旅程/

열린 세계로의 지향


이 무렵 나의 작품 활동은 시문학과 현대시학 신동아 등 문예지에 주로 시 시조를 발표하고 월간문학 문학저널 현대시학에 시조 월평과 연간평을 쓰면서 비평활동도 병행했다. “시, 그 고독의 뼈‘(현대시학 83. 9월호)를 시작으로 동지에 ’모색과 성찰’84 6) ‘시각의 양면성‘, ‘’연어의 변증법‘ ‘시조의 봄을 기다리(88. 6)등과 연간평 ‘빛의 굴절과 확산(85. 1) ’갈등과 조화의 미학‘(87.1) 등 다수의 비평을 발표하였다. 당시 현대시학 발행인 전봉건 시인의 사무실에 가려면 삐걱거리는 비좁은 나무계단을

올라야 했다. 홀로 잔뜩 책이 쌓인 책상 앞에 앉아 둥근 안경 너머 미소로 반겨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향리 마산의 신문 방송에서는 문학 신인에 불과한 나에게 과분한 관심을 가져주었다.


당시 흑백방송이던 시절, 마산 MBC 에서 ‘인물 초대석’이란 프로그램을 단독 제작하여 방영해주었다.

그때 담당 피디(김미윤 시인)는 문학을 전공한 재원이었다. 그 뒤 문인들과 자주 어울리며 자극을 받아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당당한 시인이 되었다.

그 외 경남의 일간지 경남신문에 ‘문화칼럼’을 연재하고 kbs 창원방송에 한동안 ‘새아침 칼럼’을 집필하고 직접 녹음하여 매일 아침 전파를 탔다. 같은 방송에 창사 기념축시를 쓰서 직접 육성으로 방송하기도 했다.


시작(詩作)과 비평 외에 희곡 창작으로 영역을 화대하는 극적인 계기가 있었다.

이곳에 소극장을 세우고 밤낮 땀을 흘리는 젊은 연극인들과도 자주 어울렸다. 그때 초청공연으로 마산에 온 이길재 배우와의 만남이 창작 희곡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그는 모노드라마 ‘햄릿’을 공연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당시 추송웅의 모노드라마 <빨간 피터의 고백>이 히트하면서 ‘모노의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을 때였다. 그 무렵 ‘햄랏‘이 화제가 되면서 이길재도 인기배우로 부상했다.

나의 창작희곡 이길재를 위한 모노드라마 ‘열두 개 얼굴을 가진 여자’가 서울 유서 깊은 <공간소극장>에서 80년 겨울 초연되었다.

순간 기억 상실증(해리신경증)으로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여성 주인공을 통해 그가 부딪히는 갖가지 고난과 에피소드, 영혼의 추락과 구원을 그린 1인 심리극이다


월간 시문학지(발행인 김규화 시인)가 공연 시기에 맞추어 2회에 걸쳐 희곡을 분재했다. 제작은 극단 배우극장의 김흥우 대표(동국대 연극영화과 교수, 동 예술대학장)이 맡아 무대에 올려졌다.

각종 매스컴에 화제가 되면서 배우 추송웅이 경영하던 명동의 명소 ‘카페 데아뜨르 추’에서 며칠 간 연속 공연하고, 마산의 극단 초청으로 크리스탈 호텔 부설 극장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그 후 대학로의 하나극단 전용소극장에서 여러 해 동안 롱런되었다.

두 번째 나의 창작극 ‘狂人과 옥황’’도 무대에 올려졌다, 세상에서 바보로 치부되던 주인공(狂人)이 수행의 힘으로 삼매를 얻고 신족통이 열려 직접 천궁에 가서 신(옥황)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다소 엉뚱하면서 코믹하게 전개되는, 신과 인간의 본질을 캐는 작품. 역시 시문학지에 2회 희곡이 분재되었고 이길재의 전용 '하나'소극장에서 오랜 기간 동안 공연 되었다.

나의 작품이 공연 중일 때 가끔 소극장에 들리면 연습에 집중하는 친구 이길재와 젊은 배우들의 구슬땀이 열정의 혼으로 빛나는 것을 보았다.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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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편의 시]

                                                               


그 숲에서는 여신의 향기가 난다-박제천



한밤중이면

저마다 나무에서 잠자던 여신들이 깨어난다

자작나무여신, 참나무여신, 은사시나무 여신이

님프도 부르고 반딧불이도 부르면

백설공주도 잠에서 부스스 깨어난다

호박마차며 나팔꽃마차가 백설공주를 데려가면

여신들은 그림자놀이를 한다

별빛 여우들과 나무 위로 뛰어다니며

술레야 나잡아 봐라

달빛과 술레잡기에 지칠 쯤이면

해가 떠오르고 

땀에 흥건한 채 다시 잠이 드는 여신들의 향기

숲에는 머리가 맑아지는 

그 청렬한 향기가 가득 산다.


출전;  한국시학 22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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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제천

1965-6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장자시>등 16권

현재 문학아카데미 대표, 계간 문학과 창작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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