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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르바나 Mar 25. 2022

연재 시론, 세한도 가는길(유안진)

[연재 시론]


문학공간 22. 2월호 원고


詩가 있는 산문 10 / 세한도 가는 길 (유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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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청 (시인 문예비평가)



유안진 시인, 그가 80세 되던 해(2021년), 시집 『터무니』(서정시학)를 낸 것이 등단 56년, 시집으로 18권 째라 한다. 수필 <지란지교를 꿈꾸며>로도 독자에게 친숙한 이름이다.

평생을 시인 수필가로 살면서 지금까지도 ‘시 다운 시’ 한편을 쓰기위해 산다는 겸손한 고백을 한다. 무엇이 그가 시를 쓰게 만든 것일까?


“문학은 해볼 만한 것이죠.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이니까 사실의 기록이고, 문학은 실패한 자의 기록이죠. 그래서 진실하거든요. 실패한 자가 큰 시, 위대한 작품을 내놓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세상에서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문학뿐입니다. 정말로 시다운 시, 제가 바라는 만큼의 좋은 시를 한번 써보고 싶어요.”

-한 여성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으로 문학은 실패한 자의 기록’으로 정의한다. 자기비하 인가? 그것보다 세속적인 명에나 이익을 쫒지 않는, 문학의 사명을 더욱 강조하려는 겸손어법일 것이다.

유안진 시인은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하였다. 1968년 <현대문학>지에 시 ‘잠깨는 추상’이 추천 되면서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 첫발이 반세기가 넘는 시간을, 시와 동행하는 삶의 동반자로 만들었다.


멀어서 나를/ 꽃이 되게 하는 이여

향기로 나는 다가갈 뿐입니다//

멀어져 나는/ 별이 되게 하는 이여

눈물 괸 눈짓으로 반짝일 뿐입니다//

멀어서 슬프고/ 슬퍼서 흠도 티도 없는/ 사랑이여//

죽기까지 나/ 향기 높은 꽃이게 하여요

죽어서도 나/ 빛나는 별이게 하여요//

-시 <멀리 있기> 전문


유안진 시 특유의 섬세한 서정과 부드러운 감성에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다소곳한 여성적 어조로 속삭이듯 젖어들게 한다. ‘꽃“(지상적인 것)과 ’별‘(천상적인 것)은 대칭구조로 순수와 고결함을 상징한다. 여기서 ’멀어서‘란 공간적 격리감이 둘 사이의 감정을 더욱 고조시킨다. 그것은 ’슬픔‘으로 ’흠도 티도 없는‘ 순수의 ’향기‘로 ’별‘의 고결함으로 승화시킨다. 여성의 전통적 미덕을 격조 있는 품격으로까지 승화시킨 서정의 백미(白眉)인 것이다.



  




서리 덮인 기러기 죽지로

그믐밤을 떠돌던 방황도

오십령 고개부터는

추사체로 뻗친 길이다

천명이 일러주는 세한행歲寒行 그 길이다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라신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

자욱자욱 붉게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세한도 가는 길> 전문


*출전; 유안진 시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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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유안진 (柳岸津; 1941- )


경북 안동 출생 유년기를 보냄.

1965년 <현대문학>으로 시단에 등단,

첫 시집 《달하》를 비롯해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어라》

《다보탑을 줍다》등 다수의 시집과 다수의 시선집 및 산문집

<지란지교를 꿈꾸며>등 출간.

정지용문학상, 월탄문학상, 소월문학상 특별상 등 수상,

서울대 사범대 및 동대학원에서 교육심리학 전공,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에서 박사학위 받음.

서울대 교수로 재직. 한국예술원 회원,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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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무스적 강인함, 사명을 노래한 絶唱

秋史 세한의 길, 강인한 극복정신과 의로움 강조


유안진 시를 말할 때 흔히 부드럽고 단아한 감성의 시인으로 불리운다. 하지만 후기에 오면서 그런 여성적 정체성을 뛰어넘는 시의 혁신을 꿈꾸게 된다.

정신 혹은 지성과의 융합,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영성을 향한 구애를 통해 질적 변신을 거듭하게 된다. 유안진 시인은 ‘시는 삶의 축소판‘이라는 지론처럼 그의 생애자체가 시의 터전이 되었다. 안동에서 출생하여 조선후기의 유교적 전통 속에 살면서 그는 은밀히 해방을 꿈꾸었다.


<유안진 시인은 “수모를 당하면서 시인이 되기를 맹세해왔다”고 인생을 돌아봤다. “꾀죄죄한 시골 아이라고 업신여긴 선생님에게 보여주려고, 여자라고 시집만 보내려던 할아버지에게 복수하려고, 대학 시절 사범대 폐지론의 수모를 견디기 위해 시에 목숨을 걸었다.”>-회고의 글 중에서

유안진 시를 싹틔운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벗어나고자 했던 현실의 굴레였다.

이를 정신분석학의 측면에서 보면 아니무스(Animus, 여성 속의 남성)가 무의식에 태동하는 계기가 된다. 인간이 지닌 성 정체성 안에는 역설적으로 반대 성향도 공존하는 것이다. 아니마(Anima)는 남성 속 무의식에 존재하는 여성이다. 내성적이며 다분히 감성에 이끌리는 성향으로 인격화 된다.

 

아니무스는 외향적이고 때로 이성적 논리직이며 올곧은 이념과 사상을 형성한다. 굽힘 없는 강인함으로 도전적 진취적인 성향으로 인격화 된다.

유안진 시 후기의 한 특성인 강인함과 사명감 같은 아니무스적 성향의 시 중 대표적인 것이 <세한도 가는 길>이다.

‘세한도’(歲寒圖)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귀양 가서 외부와 고립되어 있을 때, 권력보다 의리를 택해 찾아온 애제자에게 그려준 그림이다. 절제된 선과 황량한 벌판 위의 몇 그루 헐벗은 나무, 조화와 부조화가 주는 상징적 의미가 추사의 강직한 정신을 상징한다.

 

‘서리‘ ’그믐밤‘은 시의 계절과 시간적 배경으로 추위와 어둠속에 짚어가는 고난의 길임을 암시해준다. 거기에다 그림에는 없는 무형(정신)의 길을 시인의 눈은 놓치지 않는다. 그것은 ‘오십령’ 혹은 ‘세한의 길‘ ’추사체로 뻗친 길‘로 묘사된다. 그것은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이며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라신다”는 거역할 수 없는 숙명의 길이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 자욱자욱 붉게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에서 비록 고난의 길이지만 후세에 귀감이 되는 ‘의로운 길’임을 시적화자는 강조한다. 표면적으로는 추사의 길이지만 이면에는 시인(혹은 의인)의 길임을 중의(衆意)적 복선으로 제시한다. 강인함, 불변의 신념, 불굴의 선비정신이 드러나는 아니무스 시의 걸작이다.


그 외에도 “때 없이 들고나던 철조망에 할퀴어 / 갑자기 피 흘리는 오늘의 저녁놀 /평상시가 비상시로 / 출입구가 비상구로--” 시 <진실, 반어적 진실>과

“지렁이도 배밀이로 한 자 한 자씩 써 나간다 / 비장한 유서(遺書) 같다 /

민달팽이도 목숨을 걸고 조심조심 새겨 쓴다 / 공들이는 상소(上疏) 같다 /--“ 시 <겁난다>와 같은 비장(秘藏)의 신념을 노래한 알곡의 시들도 그의 시의 곳간을 채우고 있다.

 

“인생에서 시가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시를 쓸 수 없어요”

“시는 마약과도 같다. 중독이 된다. 온통 시 생각뿐이다. 요즘에 시가 높이 평가받는 것도 아니고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돈이 되지 않아 매력적이다.”

시의 길이 비록 고난의 길이지만 기꺼이 그 길, 한길을 걸어온 유안진 시인의 남은 생애가 끊임없는 변신과 실험의 푸른 파라다이스에서 늘 젊은 영혼으로 빛나기를 독자와 함께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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