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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르바나 May 12. 2022

오월, 장미와 노신사


/ 이 한편의 시  ///


끝 - 김지하


기다림밖엔

그 무엇도 남김 없는 세월이여

끝없는 끝들이여

말없는 가없는 모습도 없는

수렁 깊이 두 발을 묻고 하늘이여

하늘이여

외쳐 부르는 이 기나긴 소리의 끝

연꽃으로도 피어 못 날 이 서투른 몸부림의 끝

못 믿을 돌덩이나마 하나

죽기 전엔 디뎌보마

죽기 전엔


꿈 없는 네 하얀 살결에나마 기어이

불길한 꿈 하나는 남기고 가마

바람도 소리도 빛도 없는 세월이여 기다림밖엔

남김 없는 죽음이 죽음에서 일어서는

외침의 칼날을 기다림밖엔

끝없는 끝들이여

모든 끝들이여 잠자는 끝들이여

죽기 전엔 기어이

결별의 글 한 줄은 써두고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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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별사 ////////////

고별사


시인 김지하, 그 매서운 회초리

그 추상같은 눈썹 그 불덩이의 열정

다 어디로 갔나요?

참 허망한 것이, 죽음은 즉음의 끝은

하지만 그 끝이 눈앞에 일렁일 때

비로소 죽음이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덧없는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하지만, 실상 죽음이야말로

삶의 완성, 새로운 시작임을-


우리는 늘상 죽음 곁에 있으면서

죽음이 다른 사람의. 머나먼 별나라 애기마냥-

그대를 문단의 별이라 말하지 못하지만

그대 살아온 한 세상 거친 파도 일으키며

몸으로 항거하던 그 불굴의 정신-

무엇이 그대를 그리도 아프게 했는지-

자유와 민주, 이 땅에 왜 그리도 멀고먼지

타는 목마름으로 왜 그리 헉헉대며

꿈과 희망이며 내일까지를

송두리째 탕진해야 했는지-


70년 무렵 <오적>시가 찍힌 <사상계>가

모두 거두어지던 때, 어느 시골 책방에서

그걸 발견하고 보물처럼, 불온 서적마냥 가슴에

숨겨오던 그때,

이 젊은 문학도의 가슴 왜 그리 쿵쿵거렸는지

왜 그리 먹장구름 덮인 하늘

대낮이 밤중처럼 어둡고 깜깜했는지-하여간


이제 그 끝의 끝장을 본 그대.

후련하신지 시원하신지 궁금하네요

여기 소란스런 이 땅의 일들은 맡겨두시고

그냥 편안히 쉬시기를,

(청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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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한편의 에세이 ] /////////////


오월, 장미와 노신사

장미와 노신사


오월에 피는 꽃 중에 장미는 그 색깔의 화려함으로 개성이 강하다. 흰 장미 노랑 장미도 있지만 장미는 역시 붉은 장미가 제격이다. 장미는 사랑 요염 열정 유혹...가히 꽃 중의 꽃이라 할만하다. 꽃송이가 겹겹으로 포개져있어 신비감을 더해준다.

마치 겹겹으로 의상을 갖춰 입은 여인처럼 화려하면서 매혹적이다. 그런데 가시는 또 어떤가? 너무 가까이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인가?


장미와 노신사-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수사(修辭) 같지만 이런 경우 참으로 근사하게 어울리는 이미지가 된다.

몇 해 전인가 종로 3가 종묘공원 앞을 지나다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앞에서 발길을 멈추어 섰다. 어떤 노신사가 섹소폰을 불고 있었다. 사람들은 흥이 나서 어깨를 들썩이며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왠 지난 시절의 유랑극단이 살아서 돌아왔나?


섹소폰을 부는 노신사의 차림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우선 검은 예복차림에 카이젤 수염을 한 모습이 이채롭다. 굽이 높고 목이 긴 구두에다 방울을 달아 박자를 맞출 때마다 방울소리가 경쾌하게 울린다.

마술사들이 쓰는 기다란 모자에다 양복 윗주머니엔 빨간 장미 한 송이-영락없는 유랑극단 삐에로의 모습이다. 슬픔과 기쁨을 절반씩 섞어놓은 유랑극단의 모습이다.. 슬픈 사람이 보면 즐겁고 기쁜 사람이 보면 슬픈 것이 이런 얼굴일까? 


천국의 열락(悅樂)과 지상의 페이소스가 묘하게 조화를 이룬, 그러면서도 역설(逆說)의 불가사의를 함축하고 있는 듯,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배-ㅅ 사공--에서부터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 마아는--끝없이 이어지는 레퍼토리에 넋을 잃은 사람들, 그들을 바라보는 나까지 한동안 시간을 잊었다. 흘러간 옛 가요에서부터 제법 신식노래인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까지 레파토리가 바뀔 때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눈을 지긋이 감고 추억의 향수에 젖어있는 폼이 말 그대로 예술이다.


그는 매일 그 시간이 되면 섹소폰을 들고 나와 몇 곡을 선사하곤 바람처럼 사라진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그가 누구인지 왜 그런 복장을 하고 다니는지 잘 알지 못한다고 했다. 분명한 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이 원해서-또 그런 일을 스스로 즐긴다는 점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옛것은 잊혀지고 묻혀버린다. 그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잊혀진 유랑극단의 살아있는 유령일까?

현실은 거칠고 물길은 거세기만한데 그는 어찌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면서 이 시대의 다른 사람에게까지 즐거움을 주는 것일까?


어쩌면 자신처럼 고독하고 서글픈- 뒷켠으로 물러선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스스로 위로를 받는 것인지 모른다.

장미와 카이젤 수염의 노신사- 그는 7순을 넘긴 노인이지만 그의 열정은 나이를 초월한 젊은이였다. 그래서 그의 가슴에 꽂힌 빨간 한 송이의 장미가 더욱 싱싱해 보인다. ‘노인과 장미’의 역설적인 절묘한 조화가 시간을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빨간 장미꽃이 피어나는 이 계절-불현듯 카이젤 수염을 하고 섹소폰을 부는 멋진 노신사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그를 본지가 벌써 몇 년 전이니 혹 이미 이승을 떠난 것은 아닌지, 우리 시대의 마지막 유랑극단-식을 줄 모르는 그분의 끼와 열정을 다시 한 번 마음에 그려본다. (*)


-기청 시인의 산문집 <불멸의 새> (1부 에세이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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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청 시인의 문단 45년 기념 산문집


        <불멸의 새>


컬러판 304쪽/18900원 / 현대시문학 발행

(종이책/ 전자책 선택) 


교보문고 바로가기/

불멸의 새 검색 - 인터넷교보문고 (kyobo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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