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니르바나 May 07. 2022

어버이날 부처님 오신날에

세상 모든 어버이에게

어버이날에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하늘 그 보다도 높은 것 같애--

-

어렴풋이 듣기만 해도 가슴이 저려오는

코끝이 시큰해지는 노래를 아시나요?

오늘은 어버이 날,


세상 모든 어버이의 가슴에

빨간 카네이션을 달아드립니다.

이미 세상에 안 계신다 해도 마음속 하양 카네이션을,

사랑과 헌신의 또 다른 이름,

어버이 넉넉한 가슴에 가득한 사랑과 그리움, 감사의

노래를 불러드립니다.


그 크나큰 사랑, 고귀한 희생은 어디서 왔을까요?

머나먼 우리 조상의 조상, 우랄 알타이 산맥을 넘을 때

모닥불 피워놓고 해산을 하던 산모의 가슴 속

작고 여린 생명 하나가 꿈틀대고 있었지


그 어린 생명 포근히 감싸주던 따뜻한 사랑

어둠 속 넘보던 맹수들마저 물러나게 하는 힘

어머니 가슴은 추위와 배고픔 그 어떤 위험도

물리치는 위대하고 고귀한 사랑의 힘,


그 크나큰 사랑, 고귀한 희생은 어디서 왔을까요?

지난 그 시절 뻐꾸기 울고 장끼가 슬픈 울음 울던

그 긴긴 봄날, 울며 넘어도 서럽기만 하던 보릿고개

멀건 보리죽에 도토리밥 쑥밥 보리개떡 하나로

자식들 먹이느라 어버이는 텅 빈 허공처럼 헛배만

그래도 아이들 초롱한 눈망울 보면 힘이 솟았지


너희 대신 아플 수 있다면, 너희 대신 죽을 수 있다면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고귀한 희생

그 크나큰 사랑 그 위대한 헌신, 어디서 오나요?


행여 이 풍요의 세상에도 배고픈 어버이, 차별로 응어리진 어버이

따뜻한 자식 손길이 그리운 어버이, 병상에 누워 있는 어버이

호스피스의 손길 붙잡고 제발 내일 아침 눈뜨지 않기를

삶이 죽음보다 무겁고 아픈 어버이, 그 마지막 작별의 가슴에도

카네이션 빨간 사랑을 달아드립니다,


세상 모든 어버이에게 카네이션 한 송이를.

오늘은 어버이날-

제발 오늘 하루만이라도,

제발 오늘 하루가 전부가 아니기를,


-2022. 5. 8 어버이날에.


-기청 시인의 산문집 <불멸의 새>(서정의 오솔길46쪽)에서 


--------------------------------------------





기청 산문집 <불멸의 새>/ 컬러판 304쪽/18900원 / 현대시문학 발행

(종이책/ 전자책 선택) 


교보문고 바로가기/

불멸의 새 검색-인터넷교보문고 (kyobobook.co.kr)


///////////////////////////////////////////////



부처님 오신날에

부처님 오신날에

--다, 누구인가? (Sophy에게-제3신) 


내 친구 소피, 현자(賢者)여,


화창한 봄날, 그대 어느 하늘 머무시는지. 여기 이 땅에는 붓다 오신 날, 연등이 꽃물결을 이루고 있네, 고통의 바다, 골골이 환한 연등이 뭇 중생의 마음을 밝히고 있네. 올해는 신종 코로나 이후 모처럼 자유로운 분위기가 되었네

집에 갇혀 지내다가 야외로, 연등이 줄지어 어둠을 밝히는 산골 사찰로도 갈 수 있다네.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역설적으로.


그런데 한 가지 슬픈 소식이 있네, 이리 눈부신 봄날에, 이 땅엔 한 가지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네, 어린 소년에게, 장차 의사가 되어 아픈 생명을 구하겠다던 꿈 많은 소년,  소년에게 어느 날 찾아온 거짓말 같은 죽음,  

뇌사상태에 빠진 소년의 아버지는 결심을 했다네. 장기를 기증하기로, 그래서 다른 여러 명 생명을 구하고 소년은 하늘나라로 갔다네.

탄생과 죽음, 이 땅에 속한 누군들 예외가 있겠나?

이런 질기고 혹독한, 생사 윤회의 고리를 끊기 위해  고타마 싯타르타 왕자는 왕궁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결별하고 숲속으로 갔지. 

 

Sophy, 그리운 이름이여,


궁금한 게 있네.그 시대, 전화나 인터넷도 없던 시대지만 동서양의 성인들은 시공간을 넘어 서로 교류하고 협력 보완하며 인류의 미래를 위해 헌신한 게 아닐까? 

소피스트, 시공을 초월한 이여, 


이를테면 성인들은 뭔가 사명을 가지고 온 메신저가 아닌가 하네. 붓다의 경우 그런 유력한 증거들을 행적 속에 남겨놓았지. 고타마 싯타르타, 그가 왜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났겠나? 당시 인도는 철저한 카스트 신분제로 인간을 묶어놓았지.


그런데 붓다는 보기 좋게 신분제를 부정하고 평등정신을 내세웠지. 붓다 스스로 왕자의 신분을 포기하고 맨발에 발우 하나, 걸식을 하며 나무 밑에서 살았지. 평등정신을 일깨우는 데는 솔선수범이 최선이 아니겠나?

말하자면 혁명가 였지, 기존의 미망(未忘)을 보기 좋게 뒤집는 심오한 지혜를 가진, 선각자였지. 그대가 항상 의문을 제기하던 “나는 누구인가?“의 ‘나’는 궁극의 실재라고 보나? 뿌리 깊은 힌두인들은 참나(아트만)가 실재한다고 믿었지. 그런데 붓다의 대답은 ‘노‘였어. 청천벽력 같은 반론 아닌가?


“형성된 모두는 변하고(諸行無常), 변하는 것은 괴로움이며((一切皆苦), 만물은 무아이고(諸法無我), 궁극이 아니다.” 이 한 문장 속에 만유의 진리가 들어있다네. ‘나’마저도 변하는 하나의 과정일 뿐 아트만이나 ‘참나‘는 없다는 것, 충격이 아닌가?

또 하나, 붓다의 선언은 눈과 귀를 번쩍 뜨게 하는, 그게 무엇인가? 누구나 붓다가 알려준 길을 가면 부처가 될 수 있다네, 놀라운 선언이지. 지금껏 수많은 수행자들이 나름대로 닦아온 비법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붓다는 전부를 내주었지. 메신저로서의 사명감 때문이었을까?


<묘법연화경> 속의 ‘불타는 집의 비유’는 유명하지. 집이 불타는 줄 모르고 아이들이 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네. 부모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지. 그 때 붓다가 아이들에게 “애들아, 아주 근사한 장난감이 밖에 있다”고 외치자 다투어 밖으로 뛰쳐나와 목숨을 건졌다는 거지. ‘불타는 집’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온갖 탐욕 분노 어리석음으로 뒤덮여 불타는 줄 모르고 정신 줄을 놓은 중생들, 참 안타깝지 않은가?


빛나는 오월, 혹독한 눈과 얼음을 건너온 바람처럼-산과 들은 온통 색색의 꽃등을 달고 이날을 봉축하고 있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이 차별과 결핍과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속박과 집착에서 풀려나 아픔과 생멸이 없는 대자유의 무상보리 이루기를-   


붓다가 이 땅에 오신 진정한 뜻이-서로 사랑하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기뻐하는 아름다운 공생의 지혜 자비가 저 허공의 연등처럼 밝게 빛나기를,


변함없는 내 친구 Sophy, 그대 어느 하늘에 머물지라도---유유히 흐르는 구름, 자재로운 바람, 저 봄꽃의 여린 미소, 새벽하늘 깜빡이는 별빛 속에라도, 내 잠들지 못하는 선잠 속 꿈길에라도, 친구여 잘 있게, 그대 영원한 내 여행길의 동반자, 헤매는 낯선 길의 나침반이여,(*)


-기청 시인의 산문집 <불멸의 새>(서정의 오솔길42쪽)에서 


작가의 이전글 시와 영상, 멀티 언어예술의 미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