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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르바나 May 31. 2022

굿바이 오월, 꽃을 위한 변명

[이 한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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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느티나무-복효근


어느 비밀한 세상의 소식을 누설하는 중인가

더듬더듬 이 세상 첫 소감을 발음하는

연초록 저 연초록 입술들

아마도 지상의 빛깔은 아니어서

저 빛깔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초록의 그늘 아래

그 빛깔에 취해선 순한 짐승처럼 설레는 것을

어떻게 다 설명한다냐

바람은 살랑 일어서

햇살에 부신 푸른 발음기호들을

그리움으로 읽지 않는다면

내 아득히 스물로 돌아가

옆에 앉은 여자의 손을 은근히 쥐어보고 싶은

이 푸르른 두근거림을 무엇이라고 한다냐

정녕 이승의 빛깔은 아니게 피어나는

5월의 느티나무 초록에 젖어

어느 먼 시절의 가갸거겨를 다시 배우느니

어느새

중년의 아내도 새로 새로워져서

오늘은 첫날이겠네 첫날밤이겠네


시인 복효근 약력


전북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졸업.

91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1997년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수상.

시집으로 『버마재비 사랑』(1996년)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2002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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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편의 에세이]


모란과 귀부인


모란은 오월의 꽃 중에도 그 예사롭지 않은 품위가 압권이다.

보랏빛의 색깔이 자아내는 신비감, 휘둘어 선 자태에서 느끼는 원숙미는 어느 세도가 집안의 귀부인을 상상케 한다. 모란은 아무데서나 흔하게 볼 수 없는 꽃이다. 넉넉한 저택의 잘 가꾸어 논 정원이나 산 속 한적한 산사의 뜨락에서만 볼 수 있다.


모란이 자리한 주변에는 필시 수국이 탐스럽게 어우러져 있을 것이다. 수국은 희고 작은 꽃송이가 수없이 어우러져 무더기로 피어있는 모습이 가히 환상적이라 할 만하다. 모란의 보랏빛과 수국의 흰빛이 어울리면 더욱 아련한 환상의 세계로 빠져든다. 아무래도 이승이 아닌 별천지의 그 아리따운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모란이 피는 오월의 따사로운 아침- 이슬을 함초롬이 머금고 피어나는 자태도 아름답거니와 바람 없는 날도 나울이 치듯 한꺼번에 무너져 져버리는 그 낙화의 생리가 더욱 가슴을 여미게 한다. 붙잡고 애원하는 그런 어리석은 넋두리가 아니라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떠나버리는 그 순수와 고집스런 정절이 긴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기개가 있으나 거만하지 않고 농염이 있지만 천박하지 않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중략)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웁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 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우리가 애송하는 이 시는 김영랑이 봄날의 모란을 노래한 절창(絶唱)의 시다. 그런데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듯이 모란이 아름답다거나 모란을 너무너무 좋아한다거나 하는 그런 사적인 감상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무슨 감탄사나 화려한 수식어가 붙지 않았지만 이 시가 아름다운 이유는 뭘까? 그냥 있는 그대로의 소박한 심정을 토로하는- 말 그 자체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꿈보다 해몽이 더 좋은 비평가들은 순수시의 특성이 어떻고 유미주의가 어쩌고 하겠지만 그저 눈을 지긋이 감고 음미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면 그만이다.


시인은 모란을 통해서 소망의 이루어짐을 기원한다. ‘모란의 핌’은 소망의 성취가 되고 ‘모란의 짐’은 좌절이 된다. 그래서 ‘모란이 필 때까지의 기다림’은 삼백예순날의 희망이고 ‘모란이 지고 남’의 허무는 또 삼백예순날의 절망이 된다. 우리 인생이 희망과 절망의 끊임없는 반복이듯이 모란의 피고 짐의 반복을 통해서 기쁨과 슬픔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마지막 구절 ‘찬란한 슬픔의 봄을’에서 시인의 역설적인 정서가 드러난다.


그의 봄은-우리의 봄은- 아니 우리네 인생은 찬란하면서도 슬픈 희망과 절망이 적당히 버물어진 뭐 그런 거 아닐까? 이제 오월도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어느 한적한 산사의 정갈한 정원에는 한껏 뽐내며 가슴 설레게 하던 모란이 이제 미련 없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모란의 뚝뚝 한꺼번에 무너져버리는 어처구니없는 낙화를 보고, “바람 없는 날도 나울 쳐 나울이 쳐” 하고 읊조리던 어느 시인의 싯구가 생각나는 계절이다.(*)


-기청 산문집 <<불멸의 새>>

1부 에세이 ‘서정의 오솔길’(30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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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은 시의 원석原石에서 파생된 것이지만

산문은 때로 마음나무의 둥치가 되고

가지가 되고 나뭇잎이 되어

비로소 그의 존재存在를 완성한다.

새는 하늘을 우러러 별을 노래한다

시인은 현실의 나뭇가지에서

별의 이상을 노래하는 새다.


-기청 시인의 산문집 <<불멸의 새>> 머리말에서


인터넷 교보문고 <검색< 불멸의 새<종이책/ 전자책 선택

   기청 시인의 산문집 <<불멸의 새>>

   시론집 <<행복한 시 읽기>>

   시집 <<안개마을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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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신간 시집서평]                

조홍규 시집 《꽃을 위한 변명》 평


절제와 통찰, 번뜩이는 언어의 逆說

-기청 (시인 문예비평가)


                                                      

                                                도서출판 한강  문학공간 시선 431 

프롤로그 

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런 물음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조금만 더 귀 기울려보면 시를 훨씬 다채롭고 풍부하게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창조적 시 읽기의 빛나는 성과인 것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명시들을 획일적으로 가르치고 훈습한 결과, 시의 해석은 정형화되고 시의 본질이 퇴색되는 아픈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


시는 자유로운 것이다. 시인의 자유로운 상상력에서 창조된 ‘낯설음의’ 세계인 것이다. 그런 자유로운 영혼을 틀 속에 가두면 시는 빛을 잃게 된다. 그래서 시를 대할 때 열려있는 감성으로, 시 속의 화자가 되어보기도 하고 작자가 되어보는 것이다.

그런 다음 시인의 의도와 메시지에 귀를 기울려 본다. 그런 열린 자세만으로도 시를 훨씬 개성적 창조적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조홍규 시인의 첫 시집 《꽃을 위한 변명》이 독자에게 적지 않은 기대감으로 다가 온다. 조 시인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은 학문연구자로, 이미 90년 <문학예술>지에 평론으로 당선되어 비평가로 활동하면서 시작(詩作)을 병행해온 탄탄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시를 먼저 이해하고 시를 쓰는 것은 유리한 측면이 있다. 그만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기반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조홍규 시인은 우선 절제와 함축(含蓄)이란 시의 미덕(美德)을 꿰뚫고 있다.

시가 시 일수 있는 가장 힘 있는 호소력은 절제다. 절제는 단순히 언어의 절약 이상의 이성적 절제를 포함한다. 이성이 이미지나 상상력 같은 감성을 통제한다는 인식이 지배하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성의 발달조차도 오히려 상상력의 활동 위에서 더욱 왕성해진다는 인식이 제기되었다.


20세기 ‘시학의 코페르니쿠스‘라 일컫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예 비평가인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의 획기적인 발상이 이를 뒷받침했다. 그의 이미지와 상상력에 관한 방대한 탐구의 놀라운 업적도 이런 인식의 혁신 위에서 가능해진 것이다.

현실과 꿈을 연결해주는 것은 감성이지만 이성은 적절한 수위를 조절하고 설득력을 높혀 준다. 이런 상호보완적인 작용이 시의 일탈(逸脫; 감정의 과잉과 무절제)을 막고 지적인 호기심을 증대시키는데 기여하는 것이다.


절제와 함축

조홍규 시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절제와 함축이다. 절제는 최소의 언어로 표현효과를 높이는 방편이다. 함축은 표면적 의미와 감추어진 의미를 포괄한다. 나아가 시어의 상징성을 드러내어 이미지 형성에 상승적으로 작용한다.


<동백꽃 땅에 져도/ 붉다

붉은 것/ 그대로 붉다

져서도 피는 동백꽃은

살아서 붉더니 죽어서도 붉다

가슴에 담아 둔 것이

죽어도 살아 움직거려

가슴까지 붉다.

가슴으로 품은 것 놓치고도

흩어져도 바르게 서서 / 붉다

가슴속 알아주지 않아도

땅바닥에 굴러도 다시 꿈꾸리라/ 붉다.>

-<동백꽃 피다>전문


이 작품의 중심 이미지는 ‘붉다‘의 색채이미지다. 동백꽃의 빛깔은 그 붉음이란 속성을 통해서 정체성을 드러낸다. 붉음은 표면적으로 동백의 정열, 생동감을 나타내지만 인간정신의 소중한 덕목인 정절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 붉음의 속성은 연을 반복하면서 점층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1연 “그대로 붉다“ 2연 ”죽어서도 붉다“ 3연 ‘가슴까지 붉다” 4연 “바르게 서서 붉다” “다시 꿈꾸리라/ 붉다”


이 시에서 ‘붉다’는 어떤 수식과 미사여구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 ‘말의 뼈‘를 통해 단호함 담백함 의지의 결연함을 돋보이게 한다.

이런 점층적 구조가 독자의 가슴을 울려 급기야 처연한 슬픔의 경지까지 이끌어 간다. 절제와 함축이 지닌 시의 묘미9妙味)를 극대화한 서정의 백미(白眉)인 것이다.


<아무런 일 없었던 듯이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 생각마라

숨에 쇳소리 난다/ 아프다,

아픈 것, 사는 것/ 사는 것, 슬픈 것

커튼 사이로 햇살이 들어온다

쏟아지는 햇살/ 사는 것이 그런 것이다.

햇살 쪼며 모여 사는 것

이뤄지든, 무너지든, 넘어지든, 불 타버리든, 태나지 않든,

커튼 열어 놓은 데로 / 햇살 들어오는 대로 사는 것이다.

-<사는 것이다>전문


이 작품에도 절제와 함축이 묻어난다. 특이한 것은 커튼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시의 배경구실을 한다. 햇살은 어둠을 비추지만 현실을 일깨우고 한편으로, 내면의 각성을 재촉하는 촉매제 역할도 한다.

‘숨에 쇳소리 나는‘ 현실을 ’아픈 것‘ ’슬픈 것‘으로 정의를 내린다. 2연에서 “햇살이 들어온다“의 반복을 통해 삶의 속성이 무엇인지 시적화자의 인생관이 어떤 것인지 가늠케 한다. ”쏟아지는 햇살“처럼, ’모여 사는’ 삶의 온기를 느낀다. 삶의 이상이

‘이뤄지든‘ ’무너지든‘---그런 개별적인 성취와 상관없이 삶은 ’햇살 들어오는 대로‘ 그렇게 사는 것이라 해석한다. 순리에 역행하지 않는 무욕의 삶을 지향하는 화자의 정신이 드러난다.


존재와 관계

‘꽃’이란 대상을 통해 존재의 각성, 타인과의 관계 혹은 존재의 의미를 캐려는 시도는 일찍이 ‘무의미 시‘를 표방한 김춘수의 <꽃>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후 오규원의 <꽃의 패러디> 등에서 원조의 생각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거나 반박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아래 조 시인의 <꽃을 위한 변명>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는데 어떤 독특한 개성적인 목소리가 나올 것인지 관심 있게 살펴보기로 한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너는 하나의 몸짓이었다.

내가 너를 꽃이라 부를 때

너는 나에게 하나의 꽃이 되어 간다.

너를 꽃이라 불러도/ 너는 하나의 몸짓이었으면 한다.

누구도 닮지 않는 하나의 몸짓이었으면 한다.

우리는 무엇이 되려고 하지만/ 누구의 무엇이 될 수 없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도,

너는 너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하나의 몸짓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몸짓이다/ 너는 너 대로 나는 나 대로

서로 바라 볼 수 있는 몸짓으로 살았으면 한다.

-<꽃을 위한 변명>표제 시


<수석 가게에 / 밤새 조명등이 켜져 있다

좌대에 이름표를 밝히고/ 자유로운 영혼은

자유로운 영혼이다 / 환호한다.

자유로운 영혼은 ‘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다.

돌이다./ 돌이 아니다./ 한들

돌이라한들/ 아니라한들/ 뭐다라고 하더라도/

뭐가 되지 않아도 되는 / 그는,

다만/ 생각지 않은 곳에서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자유로운 영혼이지 못한 채

밤새 환하게 밝혀져 있다.>

-<조명등이 밤을 지새우고>


김춘수의 <꽃>에서는 ‘이름을 불러주는’ 명명행위를 통해 한갓 ‘몸짓’(무의미)에 지나지 않던 것이 나에게로 와서 비로소 ‘꽃’(의미 있는 존재)이 되었다고 진술한다. 하지만 조 시인의 경우는 좀 다르다. 명명행위에도 불구하고 바로 ‘꽃‘이 되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누구도 닮지 않는’ 개성적인 그대로의 ‘몸짓’으로 남길 희망한다.

대상과의 일체화를 거부하고 오히려 줏대 있는 존재의 타자(他者)로 남길 바라는 것이다. 4, 5연에서 그의 주장이 반복된다. 주체가 ‘나’에서 ‘우리‘로 전환하면서 보편화 일반화 시킨다. ’무엇이 되려고 하지만’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숙명적인 존재로서의 한계를 역설한다.


시 <조명등이 밤을 지새우고>에서는 수석가게에 진열된 ‘돌’을 통해 존재의 숙명(갇힌 존재)과 자유로운 영혼을 지향하는 이상과의 갈등을 차분한 지적 이성적 성찰로 조망하고 있다. 먼저 “자유로운 영혼은/ 자유로운 영혼이다”에서 긍정,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다“에서 부정, 마지막 연에서 2차 긍정과 부정으로 겉으로 보이는 것과 실상(實相)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화자는 존재의 무상에서 허무주의의 비애가 묻어난다.


통찰과 인식

대상을 보는 시인의 관점은 독특하고 예리하다. 대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속삭이는 그들의 말을 알아듣고 대변하면서 의미를 부여 한다.


<대인동 예술의 거리에 가면

항아리가 거꾸로/ 눕혀져/ 있다

큰항아리하고/ 작은 항아리가

이마는 땅에 대고/ 가랑이 사이로

종일토록/ 세상을 보고 있다

(중략)

사는 이야기는/ 이마를 땅에 대고

가랑이 사이로 보는 것이라고

// 말을 하고 있다>

-<예술의 거리에서>


<담 밑에 이름 모를 풀이 하늘거리고 있다

지금도/ 벗어나서 하늘을 날고 있는 새 되고 싶은지

담 밑에서/ 잎을 흔들고 있다.

(중략)

담 밑에서 고개 숙이고 앉아

말라 가는 꿈을 재고 있을까>

(하략)

-<담 밑을 벗어나고 싶은 하늘>


앞의 시 <예술의 거리에서>는 ‘거꾸로 눕혀져 있는’ 항아리를 통해 전도(顚倒)된 세 상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희화화 하고 있다. ‘가랑이 사이로 종일토록’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거리의 풍경을 거꾸로 뒤집어 그 안에 벌어지는 현상의 모순을 지켜본다. ‘항아리’(시적 자아의 분신)는 단순한 조형물이 아닌 현장의 목격자요 시대의 증인인 것이다.


뒤의 시 <담 밑을 벗어나고 싶은 하늘>에서도 다급한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는 ‘이름모를 풀’을 통해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의 각성과 한계를 역설적 어조로 호소하고 있다. ‘담 밑을 벗어나고 싶은’‘풀’ 대신 ‘하늘’로 환치(還置)한 것은 호소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현실의 각성

살면서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나이 들고 스스로 변해있는 모습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어제와 오늘,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문득 실감하는 것이다.


<한때는 남모르게

자유를 적고 민주주의를 썼다. 평등도 덧붙였지

민족이라고도 하며 중요한 것은

민족이 함께 나아갈 길도/ 자랑처럼 썼었지.

오늘은 / 통장에 남아있는 돈을 기억하며

나이가 들 만큼 든 지금

그 때 그 시절의 그것보다 더 많이

(중략)

나를 흔드는 것,

남겨진 생활이 이념보다 무섭게 앞을 막고 있다.>

-<일기에는>


<사람들의 축제는 이상하다

산천어든 빙어든 잡아서 가둬 두고

찾아오면 낚시 할 수 있다하고,

잡을 수 있다고/ 잡아 보라 한다.

잡아서 넣어 놓고 잡아 보라 하는데 그 걸 잡아 좋아라 하는 것도

잡아서 넣어 놓고 또 잡으라 하는 것도,

이상하다/ 잡혀서 또 잡히는 산천어든 빙어든 그들에게도,>

(하략)

-<우리들의 축제>


앞의 시는 이상(자유)과 현실(돈)의 한계를 절감한다. 그때는(젊은 날) 목숨보다 귀한 가치가 자유와 민주였지만 오늘(현실)은 그것보다 경제가 더 절실하다. 이런 가치의 전도와 괴리 앞에 화자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뒤의 시는 사람들의 축제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모순인가 하는 현실의 각성에 초점을 맞추었다.‘잡아서 가둬 두고’ 다시 ‘잡는’ 그걸 ‘즐기는’ 가학적 행위에 대해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이기삼 잔학성을 고발한다. 본질적으로 생명은 다 같이 소중한 것이라는 생명존중 사상이 깔려있다.


오래된 시간

시간의 변화와 함께 그 가치가 소멸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갈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가치가 있다. 가족이 사용하던 유품이나 당당하게 시간과 맞서는 오래된 책들이 그것이다. 

<창고에는 아버지가 타시던 자전거가 기다리고 있다.

꽃이 피는 줄을 모르는 무화과가 지키고 있는 창고에

자전거는 멈추어 질주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중략)

녹이 슬면서도 열매 맺으려는 아버지의 질주를 기다리는 자전거,

아버지가 가슴 비워내고 세워 놓았던 자전거가 서 있다.>

-<아버지의 자전거>


<시인이 누구인지

무슨 말이 쓰여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겨우 몇 집만 남아 있는 헌 책방에서

아직 굳건히 남아 열 지어 서 있는 장엄함.

오랫동안 지키고 있었던 듯 자태가 당당하다.

한번 주장한 것 변할 수 없다는 자세

아무도 주장하는 것 들어 주지 않아도 주장하는 걸 멈추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자랑이 된 시 선집은

자기 얼굴에 주름지는 줄 모르고 앉아 있다 >

-<세상의 등불이 되어>


시 <아버지의 자전거>는 선친이 사용하던 ‘녹슬어가는’ 유품을 보면서 단순히 ‘추억을 떠올리는’ 완료형에 그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고 하여 인식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의미부여를 한다. ‘기다리는’ 현재형 시간은 아직 기대가 남아있는 생동의 시간이다. ‘질주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녹이 슬면서도 열매 맺으려는’ 그런 기다림을 통해 화자는 문득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다.


시 <세상의 등불이 되어>는 헌 책방에서 고서가 된 시집이 꽃혀 있는 걸 보고 그 주장의 ‘당당함‘에 놀라고 그 흐트러짐 없는 자태의 ’장엄함‘에 감복한다. 같은 문학인으로서의 동질감과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새삼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교훈과 오래된 시간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준다.


에필로그

조홍규 시인의 시는 서두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통해 절제와 함축이란 시의 본질을 구현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학문연구자로 비평가로서 그의 입체적 기반이 시를 더욱 풍성하고 지적 이성적인 호기심을 자아내게 한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펜데믹이 세상을 휩쓸고 있는 극한의 현실에 놓여있다.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게 이 시집이 감로수와 같은 위로가 되고 힐링이 되어주길 바란다.

꾸준한 시작(詩作)을 통해 한국문단의 당당한 시인으로서 자리매김이 있길 기대해 마지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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