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낭만파 시인 셀리((Percy Bysshe shelley 1792∼1822)는 시의 정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말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 부족함을 느낀다. 어찌 삶이 선하고 행복한 순간만 있을까? 그 이면의 외롭고 쓸쓸한, 아프고 슬픈 순간까지도 재해석하여 성찰하는 것이 시의 묘미다.
지금까지 시작(詩作)과 더불어 문예지에 시론 연재나 시 비평 글을 집필해왔다. 또한 다른 시인의 시집해설도 제법 많이 써왔다. 하지만 막상 나의 시에 대해 쓰려니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자칫하면 시에다 불필요한 곁다리를 붙이는 사족(蛇足)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의 시는 발표되면 독자의 몫이다. 독자는 자신이 읽은 시를 자신만의 관점으로 재해석한다. 시에는 정답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자신이 쓴 시에 대해 어떤 실마리는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설계 시공자 겸 배포자이기 때문이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라면 용인될 수 있으리라 본다.
이 시집에 실린 작품들은 최근 5년간 <계간문예> <한국시학> <문학공간> <계간시원> <현대시문학> <문학세계> <한미문단> 등 문예지에 발표한 것과 미발표 신작을 포함하고 있다.// 시집 <안개마을 입구>이후 10년 만에 책으로 묶은 것이다.
시는 한 마디로 ‘낯설게 말하기’가 주요 관건이다. 반복되고 강요되는 일상의 권태 속에서 새로움을 찾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언어의 수사(修辭)가 요구된다. 비유와 상징에 의한 함축적 표현이 시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활기와 상상력을 넓혀주는 것이다. 시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시의 특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시를 일상적 언어로 이해하려니 어려울 뿐이다. 비유와 상징의 원관념을 파악하면 시는 생각보다 쉽고 읽는 재미까지 더해준다. 게다가 시인이 강조하는 것, 무엇인가 독자에게 전하려는 메시지(주제)를 파악한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다. 시는 그 낯설음의 새로움을 통해 삶의 활력, 희망과 성찰의 계기를 주는 것이다.//
오래 묵은 <달 항아리>의 뿌리
새 시집을 출판하기 위해 신작과 기존 발표작을 수집(?) 퇴고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첫 시집 <풍란을 곁에 두고>에 실린 시 <공간>과 이번 시집의 <달 항아리>의 통시적 상관성에 관한 것이다. 시집에 수록된 작품 70여 편의 작품 중에서 책의 중심이미지를 담고 있는 <달 항아리>와 <열락의 바다> 두 편에 대해서만 사족 아닌 해설을 붙여보기로 한다.
가) <있음도 없음도 모두 / 엎질러 비워놓은//
오백 년 맑고 푸른/ 조선의 하늘엔
비 갠 날 절로 떠오르는// 무지개도 지운다.>
나) <비어있음으로 더욱/ 고귀한 자태/
있음도 없음도 다 비운
맑고 고운/ 지순(至純))의 여백
흙으로 빚고 / 불로 구워낸 뽀얀 살결
저리 서늘한 맥박의 온기는
인욕과 비움의 절제
이름 없는 도공(陶工)의 눈물
어른어른 얼비치고
더는 내려갈 수 없는/ 아득한 바닥까지//
그 비어있음으로 더욱/
깊어지는 충만의 그리움.>
-<달 항아리> 전문
앞의 가)시 <공간>은 단수로 된 간결한 시다. 군더더기를 뺀 원형 그대로의 정수만 담았다. 반면 나)시는 가)에 비해 분량이 늘어나고 관점에서도 차이가 난다. 좀 더 확장 심화된 형식이다. 가)의 ‘공간’은 예사로운 공간이 아니다. 시의 맥락으로 보아 조선 백자의 순수하고 고결한 자태를 청정한 조선의 하늘에 빗대어 노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나)시, ‘달 항아리’는 외형보다 내면의 텅 빈 충만과 도공(陶工)의 고뇌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두 작품의 간격은 무려 40여년의 시간차가 있지만, 서로 닮아 있으나 분명 다르다. <공간>에서는 백자라는 재재 대신에 그에 비견되는 ‘조선의 하늘’이란 공간으로 대체되었다. 이에 비해 <달 항아리>에서는 백자 대신 ‘달 항아리’로 구체화 되었다.
그럼 백자라는 제재는 어디서 온 걸까? 곰곰 생각해보니 초정 김상옥의 <백자부>에까지 그 실마리를 거슬러 올라간다. 초정 김상옥 선생은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필자를 문단으로 이끌어낸 문학적 스승이다. 그의 수많은 걸작들은 한국의 문학적 자부심을 활짝 꽃피운 업적으로 평가 받는다.
<찬서리 눈보래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白鶴) 한 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드높은 부연 끝에 풍경(風磬)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 아래 빚은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김상옥 <백자부>서두 2장
한국의 전통적 미감(美感)을 노래한 훌륭한 작품이다. 하지만 대상의 밝고 빛나는 면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 너머 어둡고 힘겨운 고뇌의 그늘은 철저하게 가려져 있다. 그리고 백자보다는 외양에 그려진 그림(불로초 백학 채운 사슴 십장생)-도가적 이상향에 더 몰입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그 대상의 빛나는 아름다움, 그 미적 속성을 찬탄하는 것도 시의 중요한 사명이지만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는 없을까?
이런 생각이 불현듯 솟구쳐 올랐다. 사물의 음과 양은 어느 하나로 완성될 수 없다. 달의 상현과 하현은 보이는 부문만을 본 것이다. 하지만 가려져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인정해야 비로소 온전한 하나의 달이 된다.
그처럼 ‘있음’이란 것도 인식의 분별에 지나지 않는다. 있음과 없음을 모두 비워낼 때 비로소 본래의 맑음(空性)을 이루는 것이다.
<있음도 없음도 모두/ 엎질러 비워놓은>처럼 백자야말로 그 어떤 호사나 채움을 거부하는, 본래의 공(空)을 지향하는 그런 본성의 공간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 후 수십 년간 나의 잠재의식에 저장되었다가 어느 날, 문득 머릴 내밀고 새로운 싹을 틔운 것이 <달 항아리>다. 그러니 <달 항아리>의 뿌리는 <공간>인 셈이다.
‘달 항아리’는 같은 백자이지만 모양이 달을 닮은 항아리다.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르테미스(Artemis)여신을 닮았다. 목은 짧은데다 몸통은 풍만하여 주렁주렁 무수한 가슴을 단 다산(多産)의 여신처럼 슬프고 아름답다.
외양은 그렇지만 그 내면을 보라, 텅 비어 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텅 빈 충만,
그것은 도공이 닿아야할 깊고 아득한 지향의 세계, 그 예술적 본성의 진면목이 아니던가? 이처럼 시의 모티브는 대부분 길지 않은 시간에 시로 쓰여 진다. 그러나 수년 혹은 수십 년에 걸쳐 천천히 발아되어 꽃을 피우는 것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는다. 시 <공간>을 쓰던 때가 아직 활기찬 젊은 무렵이다. 더구나 불교에 입문하기도 훨씬 전에, 그 핵심 다르마인 공(空)을, 어떤 연유로 시에 담을 생각을 했는지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열락의 바다-정신적 지향점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열락의 바다>는 우리 모두가 열망하는 미지의 한 공간일 수 있다. 현상이면서 관념 속의 지향점인 것이다. 열락(悅樂)의 사전적 의미는 기쁨이고 희열이다. 하지만 좀 다른 확장된 의미로는 유한한 욕구를 넘어서서 얻는 큰 기쁨을 말한다.
<어디쯤인가/ 아무도 가보지 않은 익명(匿名)의 바다
시간이 녹슬지 않는 영원의//
낡은 시외버스 갈아타고/ 가다가 목마르면 생수 한 모금
울긋불긋 지상의 꽃길 따라//
걷다가 아무데나 내려 / 논두렁 밭두렁 길 하염없이 거닐다가
문득 청량한 가슴 하늘 바람길 따라/
날아오르다 혹은 심심하여/ 콧노래도 흥얼거리노라면//
아직 잠을 덜 깬 혼미(昏迷)의 / 꿈길 헤매듯/
얼비치는 파리한 바다의 얼굴/ 뜨거운 눈물 마구 흘리며//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바다여, 어디쯤인가/
그 너머 적멸(寂滅)의 무인도 어디쯤/
떨며 기다리고 있을 낯선 나//
파도소리커녕 외론 물새소리도/
오지 않는 기억의 저편, / 저 혼자 넘실대는/
바다가 너무 멀어/ 어디쯤인가, 생멸이 없는/
열락(悅樂)의 바다,>
-<열락(悅樂)의 바다> 전문
걸어서 우주의 끝까지 간다 해도 결코 궁극을 만나지 못한다. 현상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버스 타고 가다가 논두렁 밭두렁 헤매고 다니면 어느 세월에 바다를 만날 수 있을까?
첫 연 <아무도 가보지 않은 익명(匿名)의 바다/ 시간이 녹슬지 않는 영원의>는 아직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익명’인데다 ‘시간이 녹슬지’ 않으니 현상의 공간이 아니다. ‘바다’는 우리가 가야할 지향의 공간이다. 이는 정신적 영적 여정의 지향점이다. 탐하고 성내는 어리석음의 유한한 욕구를 넘어선, 그것은 곧 내 마음의 정화(맑음)이며 동시에 궁극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상은 어떤가? 우선 사물(법)에 이름을 붙이고, 그리고 좋다 나쁘다 분별을 한다, 좋으면 매달리고 집착한다. 싫으면 버린다. 이런 취사(取捨) 선택은 필연적으로 연기(緣起)를 만들고 끝없는 윤회의 그물에 걸리고 만다
둘째 연 “시내버스 갈아타고-- 논두렁 밭두렁 헤메는” 것은 현상에서 길을 잃은
방향상실의 무지를 일깨운다. 셋째 연에서는 자신의 무지에 대한 후회, 새로운 각성을 촉구한다. ‘파리한 바다’는 기다리다 지친 실망감이지만 ‘뜨거운 눈물‘에서
자신의 선택에 대한 확신을 보여준다. 다섯째 연의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기다림의 대상은 역설적으로 ‘낯선 나’이다. 결국 내 안의 자신(본성)과의 만남을 위한 여정인 것이다.
결미부분의 <저 혼자 넘실대는/ 바다가 너무 멀어/ 어디쯤인가, 생멸이 없는
열락(悅樂)의 바다,>에서 ‘바다가 너무 멀어’는 대상의 물리적 거리지만 역설적으로 ‘내 안의 각성’이란 점을 강조한다. 우리는 머나먼 ‘거기’ 바다를 지향한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앉아있는 ‘바로 지금 여기’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나의 시는 내 안의 푸른 바다이며 약속이자 희망이다. 봄이 되면 귀신처럼 알아차리고 톡톡 함성 터져 나오는 생명의 봄꽃처럼, 자연은 우주는 다 깨달아 있다. 우리도 이미 깨달아 있다. 다만 모를 뿐이다.
시인은 삶의 고락과 그 오묘한 다르마(법)의 이치를, 열락의 소리를 시의 음률에 실어 그대로 전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