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도 지난 봄의 길목에 춘설이 내린다 긴 겨울의 끝이고 생명의 봄의 서막이다
이 잠깐의 시간, 계절은 은밀한 우화(羽化)와 탈피를 반복 한다
시간은 어디서 오는가? 누가 저 긴 실꾸리를 풀고 되감기를 거듭하며 졸고 있는가?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은 사람의 분별일 뿐이다 불교적 세계관으로는 시작도 끝도 없다고 한다 색즉시공(色卽是空) 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묘법(妙法), 보이는 모든 것은 비어있음이고 비어있음은 곧 가득 차있음 이다.
남경희 시인이 두 번째 시집 <<상처위의 꽃>>을 세상에 선보인다 70여 편의 주옥같은 작품으로 세상과 소통하려는 것이다 시는 시인이 아껴둔 말의 보고(寶庫)이다 때문에 가장 소중하면서 가장 내밀한 정신의 품격까지 품고 있는 것이다 시는 그가 살아가는 삶이 빚어낸 마음의 꽃밭이다 이번 남경희 시인이 자신만의 고독한 시간을 눈물로 혹은 객혈(喀血)로 가꾸어낸 꽃밭은 어떤 모습일지, 시인은 스스로 어떤 모습일지 독자는 나름대로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 것은 전적으로 자유다.
남경희 시집을 분석하기 위해 우선 주제별로 나누어보면, 첫째 삶과 계절, 둘째 그리움 혹은 상실, 셋째 모성과 불교적 주제, 넷째 단상(短想)의 시편들로 대별 된다
삶과 계절을 소재로 한 <인생의 봄날> <밥을 삼키는 이팝나무> <추사(秋思)> <너의 겨울> <경계에 서다>와 <호미>를 비롯하여 비중 있는 작품과 <겨울의 긴 시간> <계절> <엉겅퀴><동백꽃>등 계절감각과 삶의 애환을 담은 작품들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삶과 계절감각의 시
사계(四季)의 상징의미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생명의 순환이다 사계의 순환에 따라 자연은 각각의 색깔과 의미를 부여 한다 필연적으로 시공간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인간도 마찬가지로 이합집산(離合集散)의 과정을 거치면서 변화하고 생멸을 거듭 한다 남경희 시인이 지나온 시간(계절)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산은 높고 무겁게 섰지만
나를 헤치지 않고 품어 주었습니다
바다는 시퍼런 칼날을 보였지만
헤아릴 수 없이 깊었습니다
하늘은 우러러 봐야 하지만
겸손하게 아래를 볼 줄 알았습니다
자연은 나에게 봄을 줍니다.
산은 과묵함을 가르쳐 주고
바다는 남의 허물을 품어라하고
하늘은 자신을 낮추라고 합니다
봄은 내 마음에 있었습니다
-인생의 봄날(전문)
내가 가을을 핑계로
그리움의 이름을 단풍에 새긴다면
기다렸던 이름들이
얼마나 바람에 흔들릴까
갈대가 혼자 꺾이지 않듯이
내가 그대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것도
바람에게 보내버린 그리움 때문이다
사랑이 외롭지 않다는 의미로
가을을 핑계 삼아 그대 곁에 서 보고 싶다
단풍이 그대 이름을 불 밝히고
밤벌레 우는 소리로 그리움 담으며
가을에 편지를 써서 띄우고 싶다
사랑이 깊어가는 가을
그대의 품으로 젖어 들어 눈 감는다면
나는 서걱이는 갈대처럼 슬프게 울어보리라
-추사(秋思) (전문)
캐나다 출신 문예비평가 노드롭 프라이(Northrop Frye)는 그의 저서 <비평의 해부>에서 신화원형 상징을 비평에 도입했다 그는 사계의 원형을 봄은 영웅의 탄생과 재생으로, 여름을 결혼 혹은 승리의 단계로, 가을은 죽음, 겨울을 해체의 단계로 해석했다 이것은 인간과 자연에 공통된 생명 순환의 과정으로 본 것이다
이를 동양적 불교적 세계관으로 보면, 겨울은 생의 준비단계, 봄은 재생으로 여름은 현생의 삶(내생의 원인) 가을은 죽음 즉 우화단계(모습을 바꾸는)로 인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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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희 시에서 봄은 어떤 의미일까? 시<인생의 봄날>에서 시적자아는 낮은 위치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겸손하고 지혜롭고 깊은 사유(思惟)를 가진 존재다
‘산은 높고 무겁게 섰지만‘에서 산은 곧 화자(시적 자아)를 품어주는 믿음직한 포용의 대상으로 인식 한다 같은 비교 대구법으로 바다는 ’칼날‘ 아닌 ’깊음‘으로 하늘은 ’우러러‘가 아닌 ’아래‘로의 겸손의 교훈을 준다
남경희 시인이 인식하는 봄의 상징의미는 지금까지의 생에 대한 반성이며 고백이자 영혼의 정화이다 때문에 그의 봄은 지난 시간의 반복이 아닌 진정한 ‘재생’의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의 시 <추사>에서 가을은 또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그의 그리움의 원천인 대상의 부재(不在)에서 오는 쓸쓸함, 슬픔이 묻어나는 섬세한 감성의 교향시다
그러면서도 절제를 잃지 않는 것은 이 시의 품격을 말해준다 시의 화자는 갈대와 바람의 관계를 통해 나와 그의 관계 회복을 꿈꾼다 가을은 ‘그‘에게 다가서기 위한 ‘핑계‘로 배경의 구실을 한다 그리고 '단풍’은 붉음의 색채이미지로, ‘갈대’의 백색 이미지와 어울려 화자의 간절한 바램을 더욱 고조시키는 효과를 준다 남경희 시인의 가을은 대상의 부재에서 오는 상실감,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채색된 또 하나의 ‘죽음’인 것이다.
그리움 혹은 상실의 시
남경희 시의 서술상 의미상의 특징을 보면, 우선 평이한 시어, 부드럽고 섬세한 여성적 어조, 사유를 통한 관조적 어조가 시의 분위기를 주도한다
화자와 대상과의 거리는 비교적 가깝지만 감성의 절제를 통해 적절한 거리를 조절하고 있다 의미상으로 보면 개개의 작품이 갖는 소주제(현실의 고뇌, 상실과 그리움)가 ‘삶과 고뇌의 승화‘라는 전체의 주제와 유기적으로 통합되고 있다
이제 시인의 그리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소승적(小乘的) 집착으로 끝나지 않고 어떻게 대승적으로 승화되고 있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당신이 슬플 때
내가 먼저 슬퍼집니다
당신이 아플 때
내가 먼저 아파옵니다
언제나 당신을 위한
치유의 약이 되고 싶습니다
상처위에 당신의 꽃이 피어나면
부드러운 살결을 만져 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향기에 취해서
낮잠을 자렵니다.
-상처위의 꽃
나 그대를
생각하면서 꽃을 바라봅니다
몇 장의 입술이 떨리고 있습니다./
나 그대를 잊은 적 없어
달뜨는 밤 아래 차갑게 앉았습니다
담장위로 새가 울다 갑니다./
당신의 마음이 돌아오길 바랐지만
한 송이 꽃, 아픈 상처위에 떨어지더니
꽃술에 묻힌 추억만이 쏟아집니다./
사랑은 아픈 가시
그리움은 이별이 낳아둔 형벌입니다.
-바람꽃(전문)
한 마리 새로 자랐습니다/
동네 어귀나 숲으로
날아다니는 새로 자라나
당산 나뭇가지나 살구나무 그늘이나
깃털을 다듬어 햇볕에 말리고
한 방울 피를 뽑아 소리를 내는 새
(중략)
그는 당도 하여 있었지만
새는 아직도 먼 곳을 바라보며
접어둔 날개의 지친 힘을 채웁니다
소리를 내지 못하고 접은 어깨를 가진 새/
이제는 말하십시오!
그 고요에 젖은 숨소리 들려주십시오
한 마리 새 우짖는 밤의 풍요를.
-소리새(일부)
앞의 시 <상처 위의 꽃>은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해서 다분히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상처‘와 ’꽃‘의 역설적 의미가 갈등에서 화해를 암시 한다 대상인 ’당신‘의 슬픔과 아픔을 치유해주는 ’약‘이 되고자 한다 그런 헌신적인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정신적 합일을 이루는 진정한 화해의 길을 모색한다 이로써 원망과 아픔을 넘어선 고뇌의 승화라는 주제와 통합되는 것이다.
가운데 시 <바람꽃>은 화자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자신의 존재를 ‘바람꽃’에 빗대어 대상의 부재가 주는 상실감을 아프게 호소한다 형체도 없는 가상의 꽃, 바람꽃은 자신이 만들어낸 슬픈 자화상이다 ‘달뜨는 밤’의 차고 고적한 혼자의 시간, 담장 위로 새가 울다가지만 정작 기다림의 대상은 기약이 없다 ‘몇 장의 입술이 떨리고’에서 화자의 차마 말 할 수 없는 아픔과 고뇌가 묻어난다
급기야 화자는 스스로 단호한 어조로 선언을 한다 “사랑은 아픈 가시” “그리움은 이별이 낳아둔 형벌“인 것이다 여기서 그의 그리움의 실체가 ‘가시‘ 혹은 ’형별‘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뒤의 시 <소리새> 역시 화자의 객관적 상관물로 그 모습만 바꾸었을 뿐이다
“한 방울 피를 뽑아 소리를 내는 새“처럼 절절한 어조가 유사하다 다만 꽃이란 정물에서
새라는 동적인 움직임만 다를 뿐이다 정(靜)에서 동(動)으로의 확장성은 ‘아직도 먼 곳을 바라보며’처럼 대상과의 거리를 가늠케 해준다 그의 소망과의 괴리에서 오는 절망감은 더욱 간절한 그리움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그리운 이름> <방문객> <별 헤는 밤>에서 기다림 혹은 상실감을 <탓하지 않으리> <비단향 꽃무> 등에서 현실극복을 지향하는 작품 등 전체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고뇌의 승화-모성과 불교적 주제
남경희 시의 또 다른 의미 있는 주제는 모성과 불교적 세계관이다 그것이 현실의 고뇌를 어떻게 승화시키고 있는지 작품을 통해서 알아보자
몇 개의 돌을 담 쌓아서
내 땅이라고 표시를 하는 어머니/
작은 땅에도
유채꽃 피면 노란 나비 떼 날아오고
남해 바다에도 심장을 흔드는 꽃물결도 칩니다.
(중략)
닳도록 만져도 그리움은 바라지 않아 자꾸만,
가슴에 돌무덤이 쌓여갑니다/
언제쯤 에메랄드 빛 돌이 될까
언제쯤 바다를 닮은 돌 하나 가질 수 있을까/
출렁이는 가슴에서 돌탑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돌(일부)
문을 열어두면/
갇혀있던 마음들이 들어오고
두렵고 슬픈 생의 영혼이 다녀간다‘/
열어두면 자유롭다./
저 혼자 오고 가며
자취도 남기지 않고 바람처럼 다녀간다/
생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문을 열어둔다.
-문을 열어두면(전문)
끝을 곧추세우고 섰다
봄을 캐 보려는 게지
냉이, 쑥 그리고 온통 꽃피운 봄을 담으려는 게지
뾰족한 끝을 땅으로 묻으며
제 몸은 닳아지고, 새 생명의 씨앗을 캐는 게지
제 몸 하나 희생하고 봄의 향기를 캐는 게지
하얀 냉이 꽃이 서럽게 피어도
눈물 닦아주는 봄꽃들의 소박한 세상살이
둥글게 살아간다는 건 자신을 희생하는 것
-호미(전문)
남경희 시인의 그리움의 또 다른 한 축은 모성이다 혈육의 정은 회한이 되고
필연적으로 그리움을 남긴다 어머니의 ‘돌담‘은 한계가 없는 희생이다
그런가하면 화자의 가슴에 쌓이는 ‘돌무덤’은 끝이 없는 그리움이다
/언제쯤 에메랄드 빛 돌이 될까/
언제쯤 바다를 닮은 돌 하나 가질 수 있을까/
어머니와 화자의 ‘돌’은 다 같이 꿈을 꾸지만 참담한 현실 앞에서 가슴의 ‘돌탑‘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다 ’애머럴드 빛‘의 숭고함 ’바다를 닮은‘ 무한 포용의 ’돌’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불교적 가치관으로 보면 삶은 무상(無常)하고, 변하는 것은 괴로움이고, 궁극(窮極)이 아난 것이다 생의 피할 수 없는 고(苦)의 근원을 생노병사(生老病死)로 본다 여기에 더 보탠 것이 우비고뇌(遇悲苦惱)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원수와 만나며, 원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고 몸과 마음의 집착에서 생기는 괴로움을 일컬어 팔고(八苦)라 한다 모두 인과의 연에 의해 만나고 헤어지고 그 업의 결과로 상실과 그리움의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이런 무상의 분명한 본질을 지혜의 눈으로 바라볼 때 고통은 사라지고 영혼은 정화되며 다른 차원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남경희 시인의 정서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정화되고 있음을 <문을 열어두면> <참회록> <비단향 꽃무> 등의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문을 열어두는’ 행위를 통해 화자의 닫힌 내면과 외부세계가 소통하는 것이다 걸림이 없는 번뇌와 집착이 없는 경지는 초극이다 닫힌 내면과 열린 우주의 합일, 우아일체(宇我一體)를 통해 무한한 자유를 획득하게 된다.
시 <호미>를 통해 다시 봄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호미’는 그 호미가 아니다 뾰족하고 날선 그런 게 아닌 ‘둥글게 다듬어진’ 그런 호미다
/뾰족한 끝을 땅으로 묻으며/
제 몸은 닳아지고, 새 생명의 씨앗을 캐는 게지/
제 몸 하나 희생하고 봄의 향기를 캐는 게지//
놀라운 호미의 변신, 그렇다 그것은 화자의 정서가 몰라보게 변하여 승화되고 있음이다
비록 호미는 ‘닳아지고 자신을 희생하지만’ 봄의 향기를 캐는 설렘이 있지 않은가?
냉이며 쑥 향기가 봄을 마중하는 그런 소박한 행복은 대상을 놓아버림으로서, 서로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앞서 언급한 노드롭 프라이의 말대로 시에서 상상력의 역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꿈꾸도록 돕는 것이다 시인은 그의 시를 통해 그의 세상을 꿈꾼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공유할 더 아름답고 향기로운 세상을 창조하려는 것이다 일일이 언급하지 못하지만 <밥을 삼키는 이팝나무>에서 지난 시절 우리의 자화상을, <너의 겨울> <경계에 서다> <모시나비 잠들다>등에서 완성도 높은 우수한 작품들을 눈 있는 독자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공(空)> <나의 만찬> <비움>처럼 비교적 짧은 단상(短想)의 시들도 반짝인다
이번 시집 <<상처위의 꽃>>발간을 계기로 남경희 시인의 시의 지평이 더 넓고 깊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무리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