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시 읽기
사랑은 무엇인가? 그것은 흔하고 쉽지만 지난(至難)한 일이기도 하다
알수록 더욱 모호해지는 수수께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이 상승작용을 하면 삶의 창조에 기여하지만 하강작용을 하면
원망과 미움을 낳기도 한다.
사랑은 성취되었을 때보다 미완에 그쳤을 때 더 큰 아쉬움을 남긴다
그 아쉬움은 삶의 동인(動因)이 되고 인생의 새로운 좌표가 되기도 하고 각인처럼
영원한 그리움이 된다.
하나, 대상의 다양성- 사람 자연 절대자에 대한 그리움
정순영 제7시집 <사랑>에 나타난 ‘사랑’의 대상은 다양하다 흔히 말하는
상투적 의미의 관념어 차원을 벗어나는 것이다.
물론 사람에 대한 사랑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자연에 대한, 고향에 대한, 더 나아가 절대자에 대한 사랑까지를 포괄한다.
너는 꽃이라.
삶을 유혹하는 꽃이라.
새벽에 아린 가슴으로 눈을 뜨는
순수의 꽃이라.
햇빛을 받으면 불이 지펴져
활활 불타는 정열의 꽃이라.
사랑, 너는 꽃이라.
황혼에는
붉은 추억으로 지지 않는 꽃이라.
-<사랑> 전문
시인 정순영이 생각하는 사랑의 실체가 짧고 간결한 시어로 함축되어 있다
그것은 꽃으로 의인화되고 순수-정열이란 대비되는 속성으로 나타낸다.
순수가 정적 절대적 개념이라면 정열은 동적 상승적 개념이다.
또 사랑의 실현을 순수(젊음)-정열(장년)-황혼(노년)이란 순차적 개념을 통해
삶의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마치 정신분석학자 S 프로이트가 인생을 리비도(libido, 성적 욕구)의 탄생에서
소멸의 과정으로 보는 견해와도 상통하는 것이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으로 애태우는 젊음과 대비되는, 그 미완의 사랑이야말로
‘지지않는 꽃’으로 시인은 예찬한다.
시간의 미학으로 채색된 미완의 사랑이야말로 영원한 그리움이라는 이순(耳順)의
달관을 보여준다.
우린 무엇이 되어 만나리.
꽃 지는 이별과
가슴에 옹이로 박힌
그리움 되어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흥건히 눈물 고인 눈으로
화창한 봄날
사랑으로 죽어서
죽어서는 사랑의 영혼으로
저기 저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 언덕
우린 또 무엇이 되어 만나리.
-<재회>전문
미완의 사랑이 그리움으로 영혼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
정순영 시인은 크리스천이면서 작품 속에 종종 범신론적 가치관이 드러나는 경우를 본다
굳이 불교의 ‘인연설’이 아니라도 내생에 대한 막연한 믿음은 우리네 삶의 숙제이기도 하다
정순영 시를 줄기차게 관통하는 중심정서는 ‘그리움’이다
그것은 흔해빠진 통속(通俗)이 아닌 영혼의 갈구이자 울림이다.
둘, 그리움 혹은 사랑의 변증법
헤겔(G W Hegel) 은 사랑이 단순한 개인의 욕구뿐이 아닌 타자와의 관계, 더 나아가 우주 모든 생명체의
존재방식으로 파악했다. 사랑을 하면서 대상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지만
역설적으로 대상에게 자신을 송두리째 내맡기는 자아양도 자아상실의 모순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행위를 통해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각성의 눈으로 보면 사랑은 우주 그 자체가 지닌 생명력의 정점으로 본다.
사랑은 인간경험의 가장 강열한 형식으로,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붉은 마음을 오롯이 움켜잡고/ 일생을 머무는/ 애절한 꽃
유난히 노란 꽃술/ 쪽빛으로 물드는 하얀 꽃잎/ 봄의 길목에서/
해맑은 순정으로 산화하고 싶은/ 첫사랑 꽃
-<매발톱 꽃> 일부
첫사랑의 순수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경외감을,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을 노래한 <매발톱 꽃>이 있는가 하면, <가을꽃에게 묻다>에서는
인생여정의 구비구비를 함께 해온 아내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노해한
시도 있다
세월 속에 무심히 피어있는/ 가을꽃에게 묻는다.
이제는 거울속의 주름살이 잘 보이지 않는 아내가/
추억을 만지작거리는 쓸쓸한 한숨이/ 무슨 꽃으로 피는지를 묻는다.
-<가을꽃에게 묻다> 일부
마치 공기처럼 언제나 제자리를 지켜온 아내를 ‘가을꽃’으로 은유했다
늘 가까이 있어서 관습처럼 무심한, 그래서 가깝고도 먼 강안(江岸)의 양쪽처럼
동반자이면서 때로는 어긋난 길을 서성이던 부부라는 이름의 인연
좀 더 서로를 따뜻하게 감싸주지 못한 때늦은 후회와 각성이 애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정순영 시인의 시에서는 사랑의대상이 다양하게 드러난다
<목련꽃. <바람꽃> <변산바람꽃>등 사랑의 은유로서의 ‘꽃’에 대한 애착이 각별하다.
그런가 하면 유년기의 추억이 남아있는 고향 ‘하동’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도 남다르다
<귀거래사> <고향의 아침> <귀로> <향수> <하동골에서>등이 그것이다.
색 바랜 문학책 정수리의/ 먼지를 훅훅 불며
고독에 저린 청년 그림자와/ 배를 곯았던 파도
문학강단 25시/ 아른 그림자도/ 다정하게
이젠 가르치던 선생보다/ 더 선생다운 제자의 손목을 꼭 잡고
어눌한 시를 읊으며/ 모래톱이 가지런한 강바람 속에서
추억의 머릿결을 날린다
-<귀로1> 전문
시인의 젊은 날의 자전적 삶에 대한 우수, 고향에 대한 향수가 짙게 베어나는 작품이다
시인으로서의 그를 만들어준 토대가 된 고향, 하동에 대한 고향친구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문인으로서의 자아와 정체성 그 본연에 대한 그리움인지 모른다.
그런가하면 <<간구> <빛의 목소리> <기도> <구원> <은혜의 빛> 등에서는 절대자에 대한
기원, 속죄양의식과 거듭남의 기독교적 가치관이 묻어난다.
시달린 어깨위에/ 비가 내린다/ 귀 막고 눈 막고/
깨춤추는/ 가인의 후예들
이제 다 거두어야하는/ 맵시들을 적시는/ 비가 내린다.
땅과 하늘을 울리는/ 말씀/ 기도하는/ 영혼의 바다
그 바다에로 열려있는/ 길 위에/ 비가 내린다.
-<은혜의 비> 전문
비는 정화를 바다는 영혼을 상징한다 절대자에 대한 속죄양의식, 신에 대한 간절한 기도와
그리움의 정서가 지금까지의 사랑의 의미를 더욱 승화시킨다.
정순영의 그리움의 실체는 사람에 대한 사랑, 자연과 작은 풀꽃에 대한 사랑
나아가 절대자에 대한 사랑으로 다변화 되고 시적변용을 통해 서정의 미학으로 승화된다.
셋, 비우기와 내려놓기의 자유로움
살면서 경험한 생의 희노애락이 시의 소재가 된다. 결국 시는 경험의 소산이다
거기에다 얼마간의 시적 상상력을 보태고 시적변용을 거치면 시가 되는 것이다
독자는 시인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유추하고 삶과 우주를 새롭게 해석한다.
정순영 시인은 시인으로 교육자로 대학행정의 총책임자로 치열하게 살아왔다
살면서 때로는 보람도 때로는 후회도 남겼을 것이다,
시인의 감성으로 버티기 어려운 현실의 강요 속에 고민하고 홀로 외로움에 몸을 떨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차곡차곡 쌓여온 삶의 번뇌는 무거운 짐으로 어깨를 짓누르는데
남은 것은 무엇인가? 때로 허탈과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을 것.
이제 중년을 지나 이순(耳順)의 황량한 언덕에서 바라보는 세상, 하지만 한층 시야가 넓어지고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삶의 달관이다
늘 어깨가 아파/ 잠을 설쳤다./
하나 둘/ 내려놓으니/
깊은 잠속에서/ 너를 만나고/
까치가/ 나뭇가지에 묻어 있는/
어둠을 쪼아 먹는/ 여명/
까욱까욱/ 비울수록/ 넉넉하다.
-<치유> 전문
초여름 연록색이 익어가는
새벽에 창을 여니
산허리의 안개로 몸을 씻는
옥구슬 같은 산새 노래
묵은 서재에 밀려오는
풀과 풀꽃들의 향기가
부려놓은 시간들을
상큼하게 헹구어서
천생을 사는 꿈속을
흠뻑 적시게 하는구나.
-<주렴을 내려놓고> 전문
앞의 <치유>는 삶의 번민을 내려놓고 비로소 맛보는 ‘비움의 넉넉함’이고
뒤의 <주렴을 내려놓고>는 ‘비움의 즐거움’을 노래한다
<치유>는 짊어진 짐을 내려놓았을 때 얻어지는 연륜과 지혜의 소산이다.
<주렴을 내려놓고>는 안개-산새-풀꽃이라는 소재가 주렴과 함께 어우러져 초여름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만들어준다
마치 오래된 묵화(墨畵)처럼 신비로운, 정화되고 정제된 미의 경지를
시의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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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영 시의 특징을 몇 가지로 요약해보면,
첫째, 평이한 시어와 기교를 거부하는 독자적 어법을 통해 독자와의 거리를
좁혀준다.
둘째, 인간이 지닌 희노애락의 보편적 감정을 적절한 비유와 시적변용을 통해
한국 시문학 정통의 서정미학을 계승하고 있다.
셋째, 정순영 시의 전편을 관통하는 사랑-그리움의 반추는 치열하게 살아온
삶의 현장에서 우러나는 경험의 소산으로 독자와의 공감대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넷, 정순영 시집 <<사랑>>은 문인 예술가 등 150인의 다양한 각계인사들의
감상평을 곁들여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사랑’은 사람을 포함한 뭇생명들의 ‘생명력의 표상’이다
‘사랑’이 ‘창조’ ‘화해’ ‘용서’의 다른 이름이라면 ‘미움’은 ‘파멸’ ‘갈등’ ‘투쟁’의
다른 이름이다
세상의 절반이 사랑이라면 유감스럽게도 나머지 절반은 미움으로 채워져 있다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면 세상은 낙원이 될 것이다
정순영의 시집 <사랑>이 우리사회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일깨우는 촉매제가 되기를
염원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 한다. <끝>
[서평] <<문학공간>> 2015. 5월호
교보문고 출판 345쪽 2014.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