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는 무엇인가?

행복한 시 읽기

by 니르바나

오늘의 시는 무엇인가?

-시의 문제, 시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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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신의 길이 있고 인간은 인간의 길이 있다 과학은 과학의 길이 있고 정신은 그나름의

길이 있다 그렇듯 시는 시의 길이 있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정신이 영혼이 나아갈 길이다

하지만 경제나 과학은 시의 길을 알지 못한다 거기서부터 불행은 시작된다.


오늘 우리는 2010년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오늘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가 없다

그렇듯 오늘의 시를 한마디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혼돈의 경계에 서 있다

2000년대 중반 이른바 ‘미래파‘ 논쟁이 냄비 끓듯 잠시 달아오르다가 잠잠하다

길을 잃어버린 것인가? 오늘의 시는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해묵은 질문-시는 아직도 유효한가?


시는 세상을 구할 것인가? 다소 엉뚱한 질문으로 들릴지 모른다.

혹자는 황당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명제는 비단 오늘의 문제만 아니다 .

수천 년 전 그 시대에도 이 같은 명제를 고민한 사람들이 있다.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고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한다. 때문에 시대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역사가 아닌 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 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는 이렇게 말했다. 시의 특성을 간파한 것이다.

시는 개인의 창작이면서 그 시대의 보편적 가치를 대변(반영)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보다 먼저 가까운 동양에서도 시의 효용에 대해 명료하게 말한 이가 있다.

“시는 한마디로 생각에 사악함이 없는 것이다” 공자(BC 551년~479년)는 한 마디로

시의 유익함을 꿰뚫은 것이다 여기서 시는 공자가 추린 시경의 300여편 당시 민요를

말한다. 그것을 읽으면 생각이 맑아지고 선한 마음이 된다는 뜻이다.


“시(詩)는 즐거울 때는 화락(和樂)하게 나타나고, 고통스러우면 애절하고 원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시는 인간의 감정과 사상을 아름답고 부드럽게 표현한다. 마음속에 있을 때는

뜻이지만 말로서 표현되면 시가 되는 것이다.” -논어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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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사악함(간사함)이 없으면 곧 덕이 된다 덕은 아름다움이며 연민이며 이타적이고 차별이

없는 사랑이다 이만하면 세상을 구하고도 남을 ‘황제의 위업’에 비견할 만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오늘의 시가 뒷전으로 밀리고 푸대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시를 둘러싼 사회 환경의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과학이 발전하고 경제가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물신주의(物神主義)가 팽배해졌다 과학이나 경제가 세상을 구할

것이라.철석같이 믿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인간의 정신이 피폐해지고 또 다른 절망과 불안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시의 위기, 무엇이 문제인가?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시단 내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일부 양심적인 평론가는

“무능한 비평이 시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자책하기도 한다 최원식 평론가(인하대 교수)는

‘갈림길에선 한국 시와 시 비평’이란 한 문예지 특집에서 시의 위기를 말하면서 가장

큰 이유로 비평의 무능과 직무유기를 들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시대풍조에 비하면 상당히 양심적인 고백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말에 우선 공감이 가는 이유다 그는 위기의 원인으로 시의 대중화를 들고 있다 .

좋은 독자가 되기보다 너도 나도 시인이 되려한 결과, 혼탁해지고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다음은 비평의 문제로 정작 비평의 자기점검은 소홀하다는 것,


비평이 전문화되지 못하고 질과 양이 부족하고 시보다 소설 쪽에 치중되어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시와 시집에 대한 성실한 탐사보다 서양에서 차용해온 준거에 따라 꿰맞추다보니

오히려 독자의 이해를 방해하는 장애가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사실 비평이 전문화되지 못하고 어설픈 궤변으로 전락한 면도 없지 않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동문 비평’ ‘주례사 비평’ ‘추임새 비평’이 그런 풍조를 비웃고 있다.


비평이 길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조롱꺼리가 되는 동안 시는 방황을 거듭한다.

2000년대 중반 이른바 ‘미래파 논쟁’이 한창일 때도 비평은 오히려 혼란을 부추겼다.

일부 ‘옹호파’는 마치 이들이 미래의 메신저인양 호들갑을 떨었다. ‘무시파’(단순한

반대를 넘어 아예 무시하는 경향의)는 그들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매정함을 보이기도 했다.

‘미래파’란 신조어는 사실 그 명칭에 대한 대중의 공감도 없이 사용되었다 때문에 그

명칭은 부적절하거나 다른 말로 대체되어야할 것이다.


평론가 권혁웅은 ‘미래파-2005년, 젊은 시인들‘이란 글에서 “새로운 세대가 생산하는 시는

요령부득의 장광설이거나 경박한 유희의 산물이 아니”라며 이들 작품이 “가까운

미래에 우리 시의 분명한 대안이라는 걸 인정하는 날이 올 것”이라며 추켜세웠다.

한 계간지 편집위원인 방민호 서울대 교수는 “기법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기법이 근본적인 질문에서 나온 것 같지 않고, 밑바닥까지 가지 않는 상태에서 기법으로만 나온 것

같다”고 ‘미래파’를 꼬집었다. 또 “본질적 코드가 확보되면 실험적인 시가 난해한 게 아니지만, 이쪽

코드로도 저쪽 코드로도 읽히지 않는 불가항력적인 시들이 꽤 많다”고 지적했다.


또 현대시의 정점에 서있는 오세영 유안진 두 시인은 쓴소리로 매질을 한다.

“시의 영원성과 보편성 등은 뒷전에 두고 자본주의 논리에 편승해 시선끌기에만

몰두하는 것은 아닌가 우려된다. 충격, 해체, 자해, 폭력, 패륜 등과 같은 게 현대미학의 양상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오세영)

“시인으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미래파’ ‘전통시’ 등 특정 그룹으로 묶이는 이들이다.

전부 낱낱이 잘나야 한다. 평론가들이 문제시하니까 주르르 따라가는 것은 문제다.”(유안진)

각기 입장에 따라 다른 평가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시가 새로운 모색을 위한

지향에서 출발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구모룡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기존형식에 대한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동안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새로움의 폐허상태”에 도달한 나머지 뭔가 출구가 필요했다.


시의 길, 극단으로 가는 두 갈래 길


하늘의 뜨거운 꼭짓점이 불을 뿜는 정오//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

(악수하고 싶은데 그댈 만지고 싶은데 내 손은 숲 속에 있어)

양산을 팽개치며 쓰러지는 저 늙은 여인에게도/

쇠줄을 끌며 불 속으로 달아나는 개에게도//

쓴다 꼬리 잘린 도마뱀은/ 찢고 또 쓴다//

그대가 욕조에 누워 있다면 그 욕조는 분명 눈부시다/

그대가 사과를 먹고 있다면 나는 사과를 질투할 것이며/

나는 그대의 찬 손에 쥐어진 칼 기꺼이 그대의 심장을 망칠 것이다//

열두 살, 그때 이미 나는 남성을 찢고 나온 위대한 여성

미래를 점치기 위해 쥐의 습성을 지닌 또래의 사내아이들에게

날마다 보내던 연애편지들(하략)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전반부


2000년대 중반 한국시단에 탈장르, 파격적인 언어, 생소한 어법의 새로운

시 경향이 나타났다 황병승을 비롯한 일군의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실험되었고

이를 계기로 ‘미래파 논쟁’에 불이 붙었다.

기존의 어법을 무시하고 있다 때문에 난해하다 무슨 소린지 진술에 일관성이 없다.

마치 심리적 분열현상을 보는 듯 하다 다만 ‘쓴다’는 행위의 반복을 통해 내면의 억압된

뭔가를 토해내고 있다. 이상 시의 난해성과는 다른 모습이다 이상의 시는 일정한 규칙성을 지닌다.

하지만 위의 것은 좀 더 복잡하고 난삽하다. 기존 언어의 의미구조를 벗어난 해체다 .

엄밀한 의미에서 시가 아니다. 놀이로서의 언어유희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즐길 뿐이다.


‘오래된 새로움’이란 뭔가? 서정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차림새는 낡았지만 뭔가

새로운 긴장과 모순이 드러날 때를 말 한다 시의 본령은 서정이다 서정은 새로움을 줄때(낯익은

것에서 낯설게 느낄 때) 비로소 ‘살아있는 서정’이 된다 반대로 새로움을 주지 못하면 그것은

‘진부한 서정‘에 다름 아니다.


온종일 지구를 끌다가/ 저물녘/

지평선에 누워 비로소/ 안식에 든 산맥.//

하루의 노역을 마치고/ 평화롭게/

짚 바닥에 쓰러져 홀로 되새김질하는/ 소 잔등의/

처연하게 부드러운 능선이여.

-오세영의 <일몰> 전문


지그시 눈을 감고 그려보는 이미지만으로도 통한다 낯익은 것에서 낯선 이미지를

유추해낸다 ‘시의 달인‘다운 능숙함이 보이지만 진부하거나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산맥이 ‘지구를 끄는‘ 것이나 ’소’의 휴식과 ’산맥‘의 안식, 소 ’잔등‘과 부드러운 ’능선‘의

절묘한 병치구조가 무릎을 치게 한다 그것도 ’처연하게 부드러운’ 능선을 통해 ‘노역과 휴식’이라는

대조적 이미지를 극대화하고 있다.


한국 현대시의 문제, 대안은 무엇인가?


시의 위기는 아무래도 시단 내부에서 찾는 것이 옳다 “서툰 무당이 장고 나무란다“는

속담이 있다. 아무리 장고를 나무란다 해도 책임이 면해질 수 없다 비평가가 먼저 스스로 책임을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시인이 먼저 스스로 매를 맞아야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기존의 전통적 서정을 뛰어넘어야 한다 소재와 기법, 필요하다면 형식까지

모조리 바꾸어야한다 한국 현대시의 문제는 소재의 빈곤, 죽은 기법, 형식의 빈곤, 상상력의

빈곤까지 총체적 부실의 중환자다.


소재는 널려있다. 시간과 공간을 확장시켜 바라볼 수 있다면 말이다. 너무 근시안에

빠져있다. 시간상으로 보면 현재의 좌절 고통에 대한 탄식, 얻고자 하는 온갖 욕망의

집착이거나 그것을 얻지 못한 과거의 회한이 주류를 이룬다.

시는 낯설음의 미학이라 말한다 러시아의 어느 비평가의 말이지만 이처럼 시를

명료하게 핵심을 찌른 것은 혜안이다.


그런데 이 말의 의미를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들이 많다. 생활 주변의 신변잡기가

대부분이다. 대중가요 노랫말 수준이라면 차라리 시를 포기하는 편이 낫다.

시는 언어예술이다. 시간과 공간을 확장하면 소재는 무한대로 널려있다.

우리 고전에서 보여주는 신화 민담에서부터 알지 못하는 우주에 대한 동경, 내면의 깊이로

만나는 자아에 대한 탐구(심층심리학)- 이 모든 것은 그 자체가 낯설고 신비감에

싸인 미경험의 세계다.


달이 떠오르자마자/ 코스모스가 일제히 피어올랐다

먼 신석기의 기원(祈願)처럼/ 하늘로 향한 하얀 웃음

바람이 불어오면/ 코스모스는 먼 신화(神話) 쪽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하얗게 번지는 순백의 물결

달빛이 부서져 내리는 / 신새벽에 코스모스는

하나 둘 일제히 하늘로 / 날아오르는 먼 신석기의

나비가 되었다.//

-필자의 <달과 코스모스> 전문

기청 시집<안개마을 입구>에서


낯익고 살벌한 현대문명을 바라보는 화자는 ‘코스모스’에서 낯설고 신비로운

먼 ‘신화’를 떠 올린다

패러독스(역설)다. 그런 희망으로 꽃잎을 통해 먼 ‘신석기의 나비’를 만나고

순백의 순수에 도달 한다. 달빛은 현실을 판타지로 바꾸는 매개물이다.

문명 이전의 세계, 현실에서 불가능한 희망을 시를 통해 성취하는 것이다 시의 힘이다.

시공을 확장해서 만나는 미지의 세계다.


반대로 집중을 통해 만날 수 있는 것도 있다 생명탐구 내면탐구 마이크로의 세계

과학 물리학이 가지 못하는 정신영역, 영감의 세계까지도 집중을 통해 시의 영역으로

끌어올릴 수가 있다 집중과 확장은 현대시가 나아갈 대안을 제시해준다,

시는 비유다 .기법의 문제는 대개 원관념 보조관념 사이의 거리가 너무 좁아서 생기는

문제다. 진부함, 감정의 과잉, 얕은 시각 등에서 오는 실망스러움이다.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른 강물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푸른 그 마음 흘러라”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해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자의 손수건”

앞의 시는 직유에 의존하지만 뒤의 시는 은유 상징을 통해 보다 깊은 사유를 제공한다.

기법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이도 있지만 시의 기법은 시의 품격 완성도 감동과

깊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음도 인정해야 한다.


형식문제도 고민이 필요한 부분, 한국 시는 대개 단편적 이다 보다 큰 스케일의

서사시 담시 등으로 확장해서 시의 단편성을 극복하고 시대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서사성을 확보하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이런 작업을 통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왜곡된 가치 품성을 살려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양식의 ‘문학 틀’을 실 험하고 완성시키는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 상상력의 문제는 문학의 시의 생명이다 시에 생기를 불어넣고 깊은 공감을

유도하는 것이 바로 시적 상상력이다. 그런데 허구한 날 같은 레퍼토리를 부른다면 독자는

얼마나 식상해 할 것인가?


시가 처한 오늘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과거의 지나온 길을 되새겨보면 시의 길이

보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문예사조를 돌아보면 몇 가지 법칙성을 발견하게 된다.

문예사조도 역사의 변화와 궤를 같이 한다 사회가 진화하듯 시도 진화 한다.

사회 환경이 복잡해지고 빠른 속도로 확장 되어간다 시도 변화의 속도에

부응하는 변화가 필요하다 이런 결과는 오늘의 시가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데

의미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줄 것이다.


시의 희망, 길은 열려있다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이 절규했다 출구를 찾고자 고민했다 ‘미래파’ 혹은 ‘실험파’가 시 아닌

것을 시라 우겼던지, 길이 아닌 것을 길이라 우겼던지 뭔가 발버둥치고 있을 때 우리

고매한(?) 기성시인들은 뭘 하고 있었나?

늘상 '맥빠진' 서정에만 일편단심 매달리며 안주하지 않았던가?

2010년대 오늘을 규정할 어떤 것을 준비하고 있나?

오히려 20년대로 회귀한 느낌을 주는 것은 또 무엇인가?


계급주의 프로 문학과 민족주의 문학(일련의 시조 부흥운동)이 다투던 시기, 지금은 이념과

탈이념의 두 물줄기로 양상만 달라졌을 뿐이다. 거기다가 서정을 전가의 보도처럼 옹호하는

뿌리 깊은 전통파와 불구덩이라도 뛰어들려는 철없는(?) 실험파가 서로를 삿대질 하고 있는 사이,

배는 서서히 침몰의 위기에 다다랐다 공멸(公滅)이다 더 이상 출구는 없는가?

하지만 절망은 이르다 서로를 인정하는 것에서 희망은 시작된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우주는 변하려는 속성과 불변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인간의 일도 이런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시의 길은 인간의 선택에 의해서 새롭게

개척된다. 사회는 급속도로 변한다. 가치관도 변한다 감성도 변한다. 자꾸 새로운 것을

찾아야한다. 그런데 시는 언제나 같은 레파토리만 반복한다면 독자는 싫증나고 멀어진다.

환경은 급속도로 변하고 확장되어 가는데 감성은 이에 따르지 못하니 갭이 생긴다.

시도 독자도 실망한다 이런 절규의 에너지가 마치 지진파처럼 급속하게 분출된 것이

이른바 미래파 혹은 실험파의 출현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 너무 나무랄 일도 아니다 다만 일정기간 혼돈 속에서 스스로 길을 찾도록

따뜻한 격려와 따끔한 충고를 해주어야 한다.

오늘의 시단은 어떤가? 그런 고민이 없어 보인다 방향감각도 없이 흘러가는

부초처럼 시간을 좀먹고 있다 뿌리를 깊게 내린 전통성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가지와 잎을 피우는 일도 중요하다. 그래야 ‘낯설고 놀라운’ 신선한 맛의

열매를 독자에게 내어줄 수 있지 않을까? 당당하게 말이다. (*)

글 기청 (시인 문예비평가) <문학공간> 지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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