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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르바나 Sep 27. 2019

다시 묻는, 침묵은 금인가?

[이슈 에세이]


다시 묻는, 침묵은 금인가? 



‘침묵은 금‘이란 속담이 있다. 입을 벌리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경우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입을 열어야할 일에 입을 다문다면 어떻게 될까?  한때 ‘모르쇠‘란 별명의 부도덕 기업인이 장안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검찰조사에서 ’모른다’로 입을 굳게 다문 것이다.  철통 자물쇠였다. 그런 그가 해외로 도피해 떠돌다가 결국 낯선 외국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 ‘모르쇠‘가 죽은 게 아니었다. 아직 우리 사회 요소요소에 시퍼렇게 살아있다.

지금도 그 모르쇠처럼, 그보다 더 업그레이드 된 버전이 우리 앞에 그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불리하면 무조건 ‘나는 모른다’로 버틴다.  심지어 가족 아내와 관련된 내용도 모른다고 우긴다.  나는 나다. 가족은 가족일 뿐이다. 그가 위법을 했으면 그의 몫이다.  찔러도 피가 나지 않을 냉혈한의 모르쇠 행각에 사람들은 몸서리를 친다. 철저히 인격이 분리된 인조인간, 시스템에 의해 작동되는 건 아닌지 소름이 끼친다.


사람들이 더 아파하는 것은 합법, 불법보다 그 윤리성의 마비에 있다.  기존의 가치체계가 무너지는 혼란 때문이다.  특히 청년 학생들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의문으로 혼란을 겪고 있다.  법과 정의 공정은 무엇인가?  양심과 사회윤리란 무엇인가? 특권층의 정의 공정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권력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런 국민의 혼란과 아픔을 달래줄 이 나라 정치는 어떤가?  진실을 가리는 본질보다 패거리 싸움에 몰두한다.  불리하면 되레 상대에게 덮어씌우는 독약 물 타기에 여념이 없다. 


역사의 변곡점 마다 양심의 편에 섰던 문인 

각계 지식인의 잇따른 시국선언에도

침묵하는 오늘의 문인들, 아직도 침묵은 금인가?

 

위기감이 죄 없는 사람들의 가슴을 억누른다. 다시 질문을 던진다. 침묵은 금인가?

시국선언이 줄을 잇고 있다.  전 현직 대학교수의 시국선언, 법조인 의료인의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있지만 유독 문인들의 시국선언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침묵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인지, 중립을 지킨다는 것인지, 침묵은 과연 중립일 수 있는지? 아니면 이번 사태와 직접 관련이 없다는 것인지? 뭔가 입장이 나와야 하는 게 아닐까?


문학은 선과 정의를 옹호한다. 양심을 아파한다.  그래서 윤동주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한용운은 ‘님의 침묵’에서 내면의 침묵하는 진실의 아픔을 역설적으로 ‘님의 부재’에 의탁하였다. 민족의 현실 앞에서는 독립선언의 공약삼장을 쓰고 일제에 항거했다.  이후 역사의 변곡점을 지날 때마다 더러는 글로 몸으로 항거했다.  그렇게 지켜온 나라다. 현 시점에서 문인의 침묵은 더 이상 금도 미덕도 중립도 되지 못한다

.

그들이(위정자) 입만 열면 외치던 민주 정의 공정이 바로 그들에 의해 여지없이 죽었다. 정권이 내세우던 핵심가치가 송두리째 무너지고 말았다. 국민은 혼란과 분노, 무질서에 내일이 두렵다.  이런 위중한 현실 앞에 그나마 독자의 편이라던, 정의와 양심의 편이라던 문인은 종적을 감추고 어디로 숨었는가? 눈치를 보는가? 

(글-청사, 시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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