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다이제스트
침묵하던 청와대의 입이 열렸다. 역시나 아전인수식 궤변으로 일관했다, 말 그대로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공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다. 본질은 가리고 입에 맞는 것만 보고 듣는데 능숙했다. 다른 목소리는 국론분열이 아니라고 셀프 정의를 내렸다. 광장의 외침을 직접민주주의라고도 했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시간 비용을 들여--감사드린다”는 인사까지 잊지 않았다. 대신 책임이나 그 비슷한 국정 책임자로서의 도리는 언급도 없었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지, 사태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었다. 짓뭉개진 정의 양심에 대한, 부당한 권력의 오만과 독선에 대한 분노의 외침을 눈 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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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상황을 심리적 ‘공황상태’라고 진단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심리적 ‘내전상태’라 말 하기도 한다.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혼란스럽다. 거짓이 진실을 위협하고 힘으로 짓누른다. 검찰개혁과 조국수호는 왜 찰떡궁합이 되어야 하는가?
개혁의 주체가 어떻든 목적만 달성하면 되는가? 개혁이란 미명으로 모든 게 정당화 될 수 있는가?
개혁의 핵심본질은 검찰의 중립에 있다. 정치권력의 적폐로부터 독립성을 확립하는데 있다. 지금까지 ‘권력의 시녀’에서 ‘국민의 감시자’로 거듭나는데 있다.
개혁을 구실로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 노골적으로 방해하는 행위가 법치주의, 헌법정신에 부합하는 것인가?
정치는 공황상태로 버려두고 왜 광장정치에 골몰 하는가?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 최근 국내 다양한 시각의 미디어 논평을 인용해 이해를 돕고자 한다.(필자 주)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이 정권이 흠집난 도덕성을 덮기 위해 다시 촛불을 동원하였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촛불집회를 통해 표출된 민심을 반영하여 검찰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통치행위처럼 보인다. 여기서 파시즘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파시즘은 자유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파시즘은 권력을 위해 민중을 동원하는 방식이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통치자가 반대세력을 포용하기는커녕 대화조차 안 하고 국민과 ‘직접’ 소통하겠다는 것은 파시즘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경향신문, 광장의 파시즘을 경계한다. 대학 인문사회학부 교수)
직접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광장 정치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지배세력의 권력을 옹호하기 위해 민중을 동원(자발성 여부에 무관하게) 하는 방식은 파시즘의 전형적인 행태로 보고 그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럼에도 왜 이런 위험한 줄타기를 감행하는 것일까? 그 심리적 배경으로 다음 세 가지 아킬레스건을 들어 분석한다.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은 왜 양쪽으로 찢어지는 낭떠러지에 국민을 몰아넣고 있는 것일까. 왜 그럴까. 그에게는 ‘세 가지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도전(挑戰) 받고 있다는 두려움’이다. 과거 어느 시절에는 이른바 ‘3대 권력기관’에 ‘정치적 파워의 어두운 본질’이 숨어 있었다. 검찰, 국정원, 국세청, 이곳이다. 이 세 곳은 대통령의 입안에 든 혀처럼, 대통령의 손발처럼 움직이면서 반대파를 통제했다. 그중에서도 검찰은 대통령 곁에 앉아 있는 사나운 맹견처럼 움직였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사람이 먼저다"라고 하는데, 윤석열 검찰총장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면서 문 대통령과 청와대에 도전하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 논평 중에서)
문대통령의 내면에 도사린 두려움의 실체를 첫째, 도전받고 있는 두려움을 든다. 자신이 믿고 맡긴 검찰수장의 변심(?)을 두고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둘째는 무시당하는 두려움, 왕따에 대한 소외감을 든다. 외교적으로 아베나 트럼프로부터의 불신, 내부적으로 기업인 노동자 자영업 청년층으로 확대되는 불신감을 스트레스를 자극하는 요인으로 들었다 셋째는 보복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든다. 뿌린 대로 거둘 것이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애꿎은 국민을 거리로 내몰고도 책임보다는 오히려 지지세력을 보면서 위안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서초동 촛불시위 현장에 직접 들어가 취재한 르포 형식의 기사(진보성향 미디어) 일부를 보자. 그 취재기자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해답을 얻기 위해 현장으로 들어갔다.
<서초역 남쪽 8차선을 건넌 뒤 이면도로를 이용해 교대역 쪽으로 서서히 이동했습니다. 사람들이 들고 있는 손팻말 가운데 글자가 많이 쓰인 것이 보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읽어 보았습니다.
‘이제는 울지말자 이번엔 지켜내자 우리의 사명이다’
자세히 보니 꽤 많은 사람이 바로 이 손팻말을 들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글자가 아니라 세 사람의 초상을 그린 손팻말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초상의 주인공은 노무현 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 조국 장관 세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찾고 있던 해답을 발견했다고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한겨레신문, 현장 르포기사 중에서)
해답은 간결했다. 문파들이 지지하는 현재의 권력을 퇴임 후에도 무사하게 신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충성심의 발현이었다. 간추리면 한명의 안전을 위해 수많은 국민이 희생을 치르는 것이다. 개혁은 명분이고 본질은 권력의 신변안전인 셈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심리적 저변에는 진실을 두려워하는 자기 방어본능이 작용한다.
빛이 굴절되어 만들어낸 무지개(허상)만 보는 것이다. 무지개에 가린 무수한 물방울(민중)이나 세차게 쏟아지는 폭포(저항)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빛을 심하게 왜곡시키는 프리즘은 개개인의 가치관 신념에 따라 만들어진다. 각자가 쓰고 있는 안경에 따라 사물은 다르게 보인다. 하지만 이념의 안경 너머 진실은 살아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간이라는, 양심이라는 이름의 역사의 심판대인 것이다.
오늘, 이런 비현실적인 현실에서 또 하나, 진보진영 작가의 성명 발표를 보는 것은
우리를 씁쓸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이다. 이미 만 명이 넘는 교수 지식인의 시국선언과 수많은 법조인 의료인의 시국선언이 있었지만 침묵하고 있다. 뭔가 답해야할 책임 있는 사람의 답변은 없다. 그 침묵하는 묵언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가운데 문인이란 이름의 진보작가들의 성명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들에게 묻는다. 역사와 양심 앞에 부끄럽지 않을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