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 다이어리 -2-

#단편소설

by 우성이의 일기장

1편 : https://brunch.co.kr/@sosim-in/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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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의 첫 섹스는 의외로 빨리 이뤄졌다. 상대는 복학신청 후 자취방을 구하다가 우연히 같은 부동산에서 만난 선배였다.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자취방을 구하는 수고로움이 그들에게 작은 유대를 만들어줬다. 방 계약 후 딱히 할 게 없었던 둘은 학교 앞 맥주집에서 술을 마셨고 선배의 침구류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성의 방에서 관계를 가졌다.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궁색한 변명으로 끝난 첫 섹스는 짧고도 허무했다. 몇 초 남짓의 쾌락을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너무나도 번잡스러웠다. 관계가 끝나고 우성은 담배를 피우며 옆에서 쿨쿨 자고 있는 여성의 아름다운 곡선을 눈으로 훑었다. 그래도 이제는 진정한 남자가 된 것 같은 안도감, 인생에서 언젠간 해결해야 할 숙제 중 하나를 끝냈다는 성취감이 우성을 고무시켰다.


개학까지 남은 3일 간 둘은 틈만 나면 굴렀다. 지호에게서 들었던 수많은 섹스이론들이 이제야 퍼즐처럼 맞춰졌다. 다만 한 가지 궁금했던 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하나’가 우성과 섹스를 하며 ‘오빠’라는 말을 신음과 섞어낸다는 것이다. 우성이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자 ‘하나’는 여자들은 원래 흥분하면 아무 말이나 뱉는다며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개학 전날 밤, 섹스가 끝나고 ‘하나’가 자기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우성은 고민이 생겼다. 학교에서 마주치면 ‘하나’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선배? 자기? 누나?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학교에서 만나면 ‘하나’에게 물어봐야겠다라고 결론 내린 우성은 갈증이 나 맥주를 사러 편의점에 갔다. ‘하나’와의 내일을 대비한 초박형딸기향 콘돔도 잊지 않았다.


우성은 다음 날 전공관 앞에서 ‘하나’와 마주쳤다. 분명 눈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 ‘하나’는 우성을 못 본 사람처럼 지나쳤다. 우성이 다가가 ‘하나’에게 인사하자 ‘하나’는 못내 반가운 척 인사를 건넸다. 그때 ‘하나’의 표정을 보고 우성은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하나’에게서 3일 내내 연락이 없자 우성은 자신이 버려졌다는 걸 깨달았고 총회 뒤풀이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나’옆에 꼭 붙어 앉은 남자선배. 주위에 물어보니 둘은 최근에 헤어졌다가 개학하면서 다시 재결합했다고 했다.


우성은 ‘하나’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건 ‘하나’에 대한 안 좋은 감정 때문이라기보다 당시 뭣도 모르고 ‘하나’와 뒹굴며 했던 행동들이나 달콤한 말들이 떠올라 민망했기 때문이다. 뜨거워진 체온을 낮추려 버스 창문을 조금 열어보니 어느새 학교 근처였다. 몇 해 전 ‘셋’의 가게에 들렀을 때와 사뭇 다른 풍경. 자주 가던 감자탕 집은 커피체인점으로 바뀌어 있었고 자취방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PC방은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선배 오랜만이네. 아무 데나 앉아있어. 양념 재우는 것만 마무리하고 나올게.”


‘셋’이 우성을 반갑게 맞이한다. 우성은 ㄷ자 다찌 맨 왼쪽에 앉아 가게를 둘러본다. 각종 영화 포스터와 배우들 얼굴이 걸려있고 유명 스포츠 구단의 티셔츠도 군데군데 걸려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카테고리가 우드 인테리어와 묘하게 맞아떨어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래서 갑자기 무슨 일인데?”


‘셋’이 황갈색 차를 내오며 우성에게 물었다.


“혹시 차 말고 소주 한 병 줄 수 있을까?”

“낮술? 아직 청춘이네. 잠시만 있어 봐요.”


‘셋’은 소주와 함께 금세 어묵국물과 건조 안주를 내왔다.


“이제 얘기해 봐요 선배. 혹시 돈 필요해?”

“그게 아니고.”


우성은 소주 한 잔을 다 털어 넣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며칠 전부터 노려보던 종목이 하나 있어서 장 열리자마자 좀 크게 들어갔는데 바로 밑으로 내려 박더라고. 반등 조금 오는 거에 손절하고 심란한 마음에 얼굴에 물이나 좀 끼얹으려고 화장실에 갔는데, 거울에 비친 내가 너무 초라해 보이는 거지. 돈도 잃은 데다 머리는 산발이고 수염은 길어가지고.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나랑 잔 여자들은 도대체 무슨 마음이었을까. 나 같으면 나같이 생긴 놈이랑은 자지 않았을 텐데.”

“그러니까 내가 선배랑 잔 이유가 궁금하다는 거야?”

“말하자면 그렇지.”

“다른 여자들은 뭐래?”

“못 물어봤지. 그걸 어떻게 물어보냐.”


‘셋’이 그럼 자신에게는 왜 물어보냐며 우성을 골리듯 쏘아붙이며 말했다. 당황한 우성이 횡설수설하며 별 다른 뜻은 없었다고 둘러대자 ‘셋’은 장난이라며 큰 소리로 웃었다.


“선배 20cm잖아요.”


우성은 예상치도 못한 답변에 마시던 소주를 뿜었다.


“누가 그래?”

“학과 내에서 소문이 돌았었거든요. 실제로 그 정도 되잖아요. 더 큰 가?”

“모르지 나도. 정확히 가늠해보진 않았으니까. 아무튼 그게 이유라는 거야?”

“그렇죠. 성적 호기심. 너무 나쁘게는 생각 말아줘요. 선배도 F컵 여자랑은 자보고 싶을 것 아녜요.”


우성은 곧바로 수긍했다.


“선배, 여태 몇 명이랑 자 봤어요?”

“여덟 명.”

“여덟?”

“응.”

“어휴, 그 좋은 하드웨어를 가지고.”


‘셋’이 우성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셋’은 말이 나온 김에 다른 여성들과 있었던 일을 말해주면 자신이 그들의 심리를 대변해 주겠다고 했다. 우성은 첫경험인 ‘하나’, ‘셋’의 동기인 ‘둘’, 마지막으로 중국유학생 ‘여덟’까지, 그녀들과 있었던 모든 내밀한 사연들을 ‘셋’에게 쏟아냈다. ‘셋’은 메모까지 해가며 경청한 뒤 여성의 입장에서 그들이 왜 우성과 밤을 보냈는지 설명해 주었다. 성욕, 성적 호기심, 동정심, 전 애인과 흡사한 외모 등 갖은 이유가 있었지만 우성이 원했던 답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로맨스는 없었다는 거네?”

“웬 로맨스 타령이야 20살 여대생도 아니고. 그런 걸 원했어요?”

“사랑이 있어야 섹스도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뭐 인과 관계, 전후 사정 이런 게 잘못된 거 아니냐는 거지.”

“글쎄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텐데. 그럼 선배는 걔네들 하고 왜 잔 거예요? 사랑해서?”

“차마 총각으로 죽을 순 없잖아.”

“그러니까요. 서로 목적이 달라도 원하는 바가 있으면 잘 수 있는 거죠. ‘하나’선배는 선배를 통해서 성욕을 해결하고 선배는 ‘하나’선배를 통해서 총각탈출에 성공한 것처럼요.”


‘셋’은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었다는 듯 앞치마를 벗고 자기 잔에 소주를 따르며 우성에게 물었다.


“이제 와서 아쉬워요?”

“뭔가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해본 게 조금. 곧 30대도 꺾이는데.”

“‘둘’이랑 해봤잖아요. 연애.”


‘셋’이 일부러 놀리듯 웃으며 말했다.


“한 달 만난 게 제대로 사귄 거냐 그게? 걔 그리고 방학 때 제주도 여행 가자고 지가 먼저 얘기해 놓고 여행 일주일 전에 잠수 탔단 말이야.”

“그 제주도 누구랑 간 지 알아요?”

“뭐?”

“선배 동기. 원숭이 닮은 사람.”

“원숭이? 창수 말하는 거야? 이 개새끼가 고민 상담 해줄 땐 언제고...”


‘셋’은 우성의 반응에 헛기침이 나올 정도로 웃어댔다.


가만, 창수라. 창수 이름이 나오니 갑자기 동기 ‘아홉’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도 창수도 좋아했던 동기 '아홉'. 어쩌면 더 많은 동기들이 마음 속으로만 좋아했을 '아홉'.


“그... 있잖아.”

“맞아요. 선배 20cm라는 것도 ‘둘’이 얘기해 준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한 명 더 있었네. 좀 애매하긴 하지만.”

“애매해다니? 하면 한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기억이 안 나. 같이 모텔에 들어간 거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술 때문인지 기억이 없어.”

“그게 말이 되나?”

“내 말이. 물론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까 그럴 수도 있는데, 조금의 파편도 남아있지 않단 말이지.”

“상대는 누구였는데?”

“‘아홉’이라고, 내 동기.”

“‘아홉’선배?? 나 그 선배 알아. 가게도 한 번 놀러 왔었는데.”

“‘아홉’이랑 아는 사이라고? 걔 전과해서 동기들도 소식 모르는데.”


‘셋’과 ‘아홉’이 알게 된 경위는 이러했다. 애주가인 ‘셋’은 잠이 오지 않을 때 기숙사 앞에 있는 학교 운동장 벤치에서 혼자 술을 마시곤 했는데 자신처럼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아홉’을 가끔 마주쳤고 통성명을 하다가 ‘아홉’이 같은 과였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셋’의 말에 따르면 ‘아홉’은 현재 사당역 버스환승센터 주변에서 휴대폰대리점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직도 한대?”

“그건 모르겠어요. 가게 왔을 때가 2년 전이니까 아직 하고 있지 않을까? 어차피 선배 집 가려면 사당에서 갈아타야 하지 않아요? 한번 들러봐요. 그때 명함 받은 게 어디 있을 텐데.”


‘셋’은 ‘아홉’의 명함을 찾으려는 듯 카운터 여기저기를 뒤졌다.


“근데 들른다고 해도 그때 잤는지 안 잤는지 물어보기도 애매하고 안 본 지도 오래됐고.”

“그래도 ‘아홉’선배는 동기 중에 선배랑 제일 친하다고 했었어요. 우리 둘이 잔 건 얘기 안 했으니까 괜한 걱정은 말고요. 아! 찾았다 명함.”


‘셋’이 다찌로 와 우성에게 ‘아홉’의 명함을 건넸다.


“그냥 오랜만에 동기 얼굴 본다 생각해요. 저녁 한 끼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동기끼리. 아니면 휴대폰 얼마나 썼어요?”

“한 5년 썼나.”

“5년? 누가 요즘 휴대폰을 5년씩이나 써요?”

“그래도 멀쩡해. 배터리가 빨리 닳긴 하는데 집 밖에 나갈 일이 없으니.”


‘셋’은 이번 기회에 휴대폰도 바꾸고 ‘아홉’과 저녁이나 간단하게 먹으라고 말했다. 저녁먹다 보면 술도 한잔 할 수 있는 거고 그러다 보면 그때 일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기회도 생기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우성은 적당히 취기가 오른 지금이라면 술의 힘을 빌려 ‘아홉’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성과 ‘셋’은 ‘셋’의 대학생 남자친구 이야기를 안주삼아 소주 두 병을 더 마셨다. 저녁장사 준비로 알바들이 하나 둘 출근하자 우성은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한사코 거부하는 ‘셋’ 때문에 5만 원 권 한 장을 던지듯 계산대에 두고 가게를 나왔다.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꼭 말해줘요!”라는 ‘셋’의 말이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우성은 사당역까지 버스대신 택시를 타기로 했다. 아무래도 버스 승객들이 술냄새 때문에 불쾌할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였다. 택시를 타고 기사님에게 목적지를 일러준 뒤 술냄새를 없애려면 뭐가 좋을까 고민하면서 창문을 열었다.


우성과 ‘아홉’은 당연하게도 신입생 OT에서 처음 만났다. 고향이 같아 조금 더 친밀감이 들었지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우성은 OT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했다. 선배와 동기들 앞에서 유쾌한 척하는 것도 힘들었고 초등학생도 속지 않을 선배들의 몰래카메라에 당해줘야 하는 것도 곤욕이었다. 선배들은 신발정리를 안 했다는 이유로 신입생들에게 기합을 줬다. 그 과정에서 선배에게 대드는 신입생 때문에 험악한 분위기가 되었으나 이는 당연하게도 선배들이 미리 심어둔 가짜 신입생이었다. 몰래카메라가 끝나고 선배들은 “너희들 추억을 만들어주기 위해 준비했다.”며 신입생들을 토닥였고 신입생 중 몇 명은 무서웠다며 울기까지 했다.


나이가 제일 많아 보이는 선배가 가방에서 발렌타인 30년 산을 월드컵 우승 트로피마냥 꺼내 들었다. 그러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우성은 저들의 환호가 어디서 비롯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고 기괴함마저 느껴졌다. 뭘 알고나 소리 지르는 건지. 여기서 발렌타인 30년 산 맛은 제쳐두고 냄새라도 맡아본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우성은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도 마음대로 사라질 순 없으니 우선 조장을 맡고 있는 선배에게는 일러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소문 끝에 찾은 조장은 여장 콘테스트를 준비 중이었다. 그는 토끼 머리띠를 끼고 망사 스타킹을 신은 채 화장을 받고 있었다. 우성이 조장에게 조심스레 돌아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큰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던 조장은 걱정되는 눈으로 왜 그러냐고 되물었다. 우성의 입에서 “그냥 가고 싶어서요.”라는 말을 듣자 조장의 눈빛이 싹 바뀌었다.


조장은 우성을 흡연장으로 데려갔다. 우성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힐 위를 위태위태하게 걷는 조장의 균형감각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기숙사는 어떻게 가려구요. 택시비 엄청 나올 텐데.”

“가평역까지만 가면 막차 탈 수 있는 것 같더라고요.”


짝다리를 짚고 있던 조장이 토끼 머리띠를 흔들거리며 입에서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래도 선배들이 후배들 위해서 준비한 자린데 간다고 하면 안 되죠. 학생회에 보고하고 알려줄 테니까 일단은 들어가 계세요.”


우성은 막차가 곧 끊기니 최대한 빨리 알려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조장이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차마 말하지 못했다.


10분, 20분, 30분... 아무리 기다려도 학생회로부터 아무런 전언도 없었다. 결국 막차가 떠나가는 시간에 신입생들 사이에 억지로 끼여 앉아 조장의 여장 콘테스트 1등을 축하하는 박수와 환호를 보내야 했다. 그렇다고 20만 원에 가까운 택시비를 내고 기숙사로 돌아가기엔 돈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에 우성도 이쯤에서 포기하기로 했다.


공식 일정이 모두 끝나고 과 별로 모여 술을 마셨다. 별 재미도 없는 술게임은 왜 계속하는 건지. 술을 마시기 위한 자리인지 아니면 안 마시기 위한 자리인지. 흥미가 떨어져 슬슬 들어가 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선배들이 우성을 찾기 시작했다. 기숙사로 돌아가겠다던 이야기가 어떻게 와전되었는진 몰라도 선배들 사이에서 우성은 골때리고 재밌는, 소위 이번 신입생 OT의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우성과 같이 선배들 술자리에 끌려다니던 게 ‘아홉’이다. 여자동기 중에 제일 활발하기도 했고 예쁘장하게 생긴 것도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여러 술자리를 오가던 우성과 ‘아홉’은 결국 한숨도 못 자고 밤새워 술을 마셨다. 어느샌가 둘은 서로가 서로의 흑기사를 자처하며 끈끈한 동료이자 전우가 되어 있었다. OT가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온 우성과 ‘아홉’은 해장을 위해 감자탕 집을 찾았다. 해장은 해장술로 하는 거라는 ‘아홉’의 말에 둘은 또 초록병을 들었다.


“너 집에 간다고 그랬다며?”

“응. 별로 재미도 없고.”

“신입생 OT에서 돌아간다고 하는 사람은 전국에 너 한 명일걸?”

“죽상을 하고 앉아있을 바에 그냥 사라지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어.”

“그래도 단체생활에서 그러면 안 되지. 너 돌아가는 길에 사고라도 나 봐. 학생관리 못했다고 뉴스 나오고 그럴 텐데.”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애초에 OT를 참석한 내 잘못이다. OT라는 게 이런 형태일 줄은.


“그래도 난 너 대단하다고 생각해. 난 속에 있는 말 못 하거든.”

“그래? 전혀 그런 캐릭터 아닌 것 같던데. 너처럼 붙임성 좋은 사람은 처음 봤어.”

“그런 척만 하는 거야. 옛날에...”


‘아홉’은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하던 ‘아홉’은 왕따를 심하게 당해 아버지 고향인 대전으로 전학을 왔다. 다행히도 좋은 친구들을 만나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었던 ‘아홉’은 수능이 끝나고 과거 청산의 의미를 담아 성형수술을 받고 문신을 새겼다고 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는 이유로 계산은 ‘아홉’이 했다. 우성과 ‘아홉’은 자판기 커피를 하나씩 뽑아 들고 가게 앞 의자에 앉았다. 자연스레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아홉’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우성이 물었다.


“너 담배 피워? OT에서는 안 피우는 것 같더니.”

“여자가 담배 피우면 괜히 뒷말 나오잖아. 참느라 혼났다니까.”

“담배는 언제 배웠어?”

“왕따 당할 때. 친구가 없으니까 이거라도 있어야겠더라고. 담배 피우는 건 비밀로 해줘. 아무도 모르니까.”


담배를 마저 피운 뒤 우성과 ‘아홉’은 친하게 지내자는 약속 아닌 약속을 하며 각자의 기숙사로 돌아갔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난 우성은 대전행 기차표를 예약했다. 개학까지는 아직 1주일이 남아 있었고 못다 가져온 짐도 챙겨 와야 했다. ‘아홉’에게 물어보니 그녀는 기숙사에 남아 있겠다고 했다. 담배나 한 대 피우자는 ‘아홉’의 말에 우성은 서둘러 짐을 챙겨 나왔다. ‘아홉’에게 줄 숙취해소음료를 사러 편의점에 들어갔다가 그것만 주긴 뭣해서 음료와 과자 몇 개를 집었다. 여자기숙사 앞에서 만난 우성과 ‘아홉’은 인적이 드문 기숙사 뒤 공터로 가 담배를 피웠다. 우성은 헤어지기 전 편의점에서 산 것들을 ‘아홉’에게 건넸고 ‘아홉’은 우성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1주일 뒤에 보자고 말했다.


개학 후 동기들 사이에 ‘아홉’이 남자선배들을 꼬시고 다닌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아홉’을 불러낸 것은 남자선배들이었지만 어찌된 게 꼬시는 쪽은 그들이 아니라 ‘아홉’이 되어 있었다. 고향인 대전에 있는 동안 남자선배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먹여 힘들다는 전화를 ‘아홉’으로부터 몇 통 받았었기에 헛소문이겠거니 하고 우성은 생각했다.


전공관 앞 흡연실에서 다음 수업을 기다리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우성에게 원숭이를 닮은 과대 창수가 담배를 빌리며 말했다.


“너 어제 술자리 왜 안 나왔냐?”

“어제 좀 피곤해서.”

“그래? 어제 재밌었는데.”


창수가 바닥에 침을 찍 뱉었다.


“그나저나 ‘아홉’얘기 들었냐?”

“무슨 얘기?”

“남자선배들 졸라 꼬시고 다닌다잖아. 모텔에서 나오는 거 봤다는 애도 있던데.”

“누가 그래?”

“내가 과대잖냐. 나한테 들어오는 얘기가 좀 많아야지. 어제만 해도 동기들끼리 술 마시기로 했는데 남자선배들이랑 술 마시러 갔잖아.”

“선배들이 부르니까 갔겠지. 종훈이랑 현석이도 맨날 여자선배들한테 불려 다니잖아.”

“에이 그거랑 이거랑 같냐?”


창수가 담배를 오른손에서 왼손을 바꿔 피며 말했다.


“그리고 성괴에다가 문신에, 담배까지 피우는 앤데. 과거에 어땠을지 사이즈 딱 나오잖아.”


우성은 모르는 척 창수에게 물었다.


“걔 담배도 피워?”

“아니 걔가 솔직히 좀 이쁘장하긴 하잖아 고치긴 했지만. 그래서 좀 친해지려고 개학 전에 치킨도 먹고 밤에 학교도 돌아다니고 했었거든. 근데 나한테 자기 흡연자라고 하더라고. 아무도 모르니까 비밀로 해달라면서.”


창수는 담배를 피우러 온 다른 남자동기들에게도 ‘아홉’에 대해 떠들어댔다. 소문은 당사자의 동의도 없이 사실이 되어갔고 동기들은 점점 ‘아홉’을 멀리했다. 그 때문인지 ‘아홉’은 우성을 자주 찾게 됐다. 밥을 먹을 때도, 과제를 할 때도. 동기들끼리 있는 자리에서 ‘아홉’에게 연락이 오면 참 곤란했다. “동기들끼리 있으니 오지 마.”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아홉’을 부르면 동기들이 불편해할 게 뻔했다. 그렇게 우성과 ‘아홉’도 조금씩 멀어졌다. 과에서 겉돌던 ‘아홉’은 교양 수업에서 만난 타과 사람들이랑 가깝게 지냈다. 머지않아 남자친구도 생긴 듯했는데 동기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분위기였다. ‘아홉’은 1학기가 끝나고 휴학했고 우성은 군대에서 그녀가 전과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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