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집에 중학교 동창이 살고 있었다
다음 주 월요일이면 지긋지긋했던 이 집을 떠난다. 우리나라 전세제도는 붕괴된 지 오래다. 정상적인 제도 안에서도 어떻게든 틈을 찾으려 하는 것이 인간들인데 기형적인 제도를 억지로 유지하려 하니 잘 돌아갈 리가 있나. 내 돈 가지고 장난친 집주인 때문에 허비한 시간만 꼬박 두 달이고 작성한 서류만 몇 십장이 훌쩍 넘는다. 게다가 잊을만하면 들리는 저 개소리는 정말이지 중식볶음밥에 들어가는 굴소스처럼 짜증의 한계치를 극한까지 올려준다. 웃긴 건 개 짖는 간격이 묘하게 일정해서 다음 짖을 타이밍을 무의식적으로 계산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번 짖기 시작하면 얼마나 오래 짖어대는지 기가 차서 돌려본 녹음기에는 35분이 찍혀있었다. 처음엔 짜증이 나다가도 오죽하면 '목에 무리가 가진 않을까?' 하며 개 걱정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것도 이틀 남았다. 방금 은행에 대출원금과 이자까지 상환했으니 이틀 뒤 짐과 함께 이 '행복빌라 301호'에서 사라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두 달 동안 은행부터 변호사사무실, 실업급여를 위한 고용센터까지 정말이지 바쁘게 돌아다닌 내게 '보상'을 주기로 했다. 이 보상이란 스스로가 생각해도 정말 대견할 때만 하는 행위다.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이벤트 치고 실상은 그리 대단한지 않은데 그냥 평소 먹고 싶었던 배달음식을 여러 개 시켜놓고 코가 비뚤어지게 맥주를 마시는 것뿐이다. 취해서 잠에 들면 일어나 맥주를 마시고, 또 취해서 잠에 들면 또 일어나 맥주를 마신다. 이렇게 주말 동안 앞뒤 생각 없이 계속 취해있으면서 춤을 추기도 하고 거울을 보며 자문자답을 하는 것이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나의 은밀한 보상이다. 나는 빛 따위가 나의 보상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모든 창을 암막커튼과 흑지로 막아버리고 분위기 좋은 음악을 준비했다. 저번 보상에는 Artic Monkeys 앨범을 틀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Lou Reed 앨범과 나의 비밀스러운 시간을 함께하기로 했다.
경건한 마음으로 최고의 보상을 위한 자잘한 밑작업들을 수행하고 맥주를 사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물론 에어컨과 스피커는 끄지 않고 놔두었다. 밖에서 마주할 찝찝한 여름땀을 선선한 집 공기와 Lou Reed의 무심한 듯 깊은 목소리가 편의점에서 돌아온 나를 반겨줄 것이다. 땅에 질질 끌리는 슬리퍼 소리가 마치 행진곡처럼 들려 발걸음이 가벼웠다.
편의점 문을 열자 문 위에 달린 종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신선한 에어컨 바람이 발가락부터 몸을 타고 올라왔다. 냉장고에 가득 찬 맥주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매력을 뿜어내고 있다. 그들의 매력을 한껏 눈으로 즐긴 뒤 4+1 이벤트에 꼭 맞게 일본, 중국, 유럽 맥주를 알뜰하게 섞어 담았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까 주문해 뒀던 음식들이 도착해 있었다. 배달음식과 맥주를 양손 가득 들고 들어온 뒤 맥주부터 냉장고에 넣었다. 차곡차곡 로고가 같은 방향을 향하도록 정갈하게 정리했다. 금방 먹을 2~3캔 정도만 냉동실에 넣어둔 뒤 식탁에 앉았다. 이번 보상의 시작은 제일 먹고 싶었던 페퍼로니 피자다. 나는 피클 등과 같이 딸려 온 파마산 치즈 한 봉지를 통째로 페퍼로니 피자 한 조각 위에 쏟아부었다. 한 입 베어 물자 파마산 치즈가 여기저기 꽃가루처럼 날렸다. 맥주캔을 따니 쏴아아아 탄산 소리가 들린다. 더 크게 듣고 싶어 귀를 갖다 대자 톡톡 튀는 탄산이 귀를 간지럽혀 몸이 부르르 떨린다. 입 안 가득인 피자를 대충 씹어 삼키고 맥주를 벌컥벌컥 마신다. 맥주는 먼저 식도를 타고 내려갔던 피자를 위장 안으로 밀어넣으며 시원하게도 내려간다.
보상을 시작한 지 10시간. 아마 두 번 정도 취해 뻗었다가 다시 일어난 상태였을 것이다. 취한 와중에도 공복감을 느껴 식은 떡볶이를 데우고 있었는데 위에서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단발성이 아니라 분명 누군가 뛰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예전에도 윗집(2층 아저씨 말에 따르면 젊은 커플이라고 한다)으로부터의 소음공격은 종종 있었던 일이다. 밤늦게 빨래 돌리는 소리라든지 스포츠 경기가 있는 날 친구들과 환호하며 떠드는 소리라든지. 그래, 이 정도의 소음은 이웃 간에 이해해 줄 수 있는 수준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넓은 마음으로 양보해 주는 것이다. 저런 사람들과 괜히 얽혀봐야 좋은 일 하나 없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경우가 다르다. 몇 년 만에 돌아온 나의 보상을 방해하다니. 워낙 남과 부딪히는 걸 싫어하기에 평소 같았으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술도 마셨겠다 이사도 가겠다 다시는 볼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갑자기 발끈하는 마음이 커져 윗집에 따져 묻기로 했다. 눈에 보이는 옷을 대충 걸치고 위층으로 올라가니 401호 문 밖으로 음악소리와 쿵쿵거리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불협화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집 안 꼴을 상상해 보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띵동-
초인종을 누르자 일순 조용해졌다. 새벽 5시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침묵.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개가 문 앞까지 달려와 현관을 긁어대며 짖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개소리에 짜증이 나 문을 두세 번 두들겼다.
"누구세요?"
문 건너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응당 남자와 마주할 줄 알았기에 바짝 힘이 들어가 있었는데 긴장이 조금 풀렸다.
"밑집 사는 사람인데요, 너무 시끄러워서요."
"죄송합니다."
새벽 5시에 쿵쿵거릴 인간이라면 왠지 적반하장으로 나올 줄 알았으나 저자세로 나오니 뚜렷한 수가 없었다. 죄송하다는데 뭐 어떻게 하겠나. 다소 맥이 빠진 나는 떡볶이나 먹을 생각으로 내려가려 했다. 그런데 불길한 알림음을 내며 401호 현관문이 덜컹하고 열렸다.
"뭐야?"
남자 목소리였다. 잔뜩 언짢음을 머금은 목소리는 여차하면 달려들겠다고 경고하는 듯했다. 뒤를 돌아보니 문신으로 몸의 절반을 덮은 남자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링피트와 강아지를 가슴팍에 안고 있는 여성이 있었고 조그만 흰 털의 강아지는 주인과 함께라 그런지 기세등등하게 짖어댔다.
"밑집 사는 사람인데요 너무 시끄러워서 올라왔습니다. 이 새벽에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하십니까?"
취한 상태였지만 흥분하지 않고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나 문신남은 새벽에 남의 집까지 와서 무슨 행패냐며, 사과를 해도 모자랄 판에 이겨먹으려 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심술이 나 비아냥거리며 "제발 생각 좀 하면서 삽시다. 생각 좀."이라고 말했다. 참고 살아온 층간소음이 억울해서 한편으로는 문신남이 내게 달려들기를 바랐다. 주짓수를 오랜 기간 수련했기 때문에 웬만한 양아치들은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문신남은 내 속마음이라도 읽은 듯 튀어나온 배를 흔들며 내게로 걸어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미 시뮬레이션은 끝내두었다. 나는 손을 들어 자세를 잡고 다가오는 몸싸움에 대비했다. 문신남의 손이 내게로 향하는 순간 손목을 꺾고 뒷 포지션을 잡아 제압할 생각이었다.
"오빠 그만해."
문신남의 여자친구가 옷을 잡아당기며 그의 전진을 무마시켰다.
"죄송해요. 사용법만 익혀 본다는 게 하다 보니 길어졌네요. 주의하겠습니다."
문신남이 씩씩거리며 손을 놓으라고 해도 여자친구는 놓지 않았다. 그때 순간 머릿속을 치고 가는 것이 가만 보니 윗집 여자는 학창 시절 아는 사람을 많이 닮아있었다. 설마 하는 나의 마음은 그녀 팔목에 있는 문신을 보고 확신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녀를 알고 있다.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서 꽤 가깝게 지내던 때도 있었다. 중학교 졸업하고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그녀는 연신 사과의 뜻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구시렁거리는 문신남을 집 안으로 떠밀었다. 401호의 문이 닫히고 썰렁한 복도 가운데 남겨진 나도 어안이 벙벙해져 301호로 돌아왔다. 방금 데워두었던 떡볶이 냄새가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식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있었다. 술도 떡볶이도 포기한 채 침대에 누워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려 했으나 금방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언제 쓰일지 몰라 공구함에 처박아둔 피스를 찾듯 기억을 더듬어가며 그녀와의 추억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