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스몰토크 수난기

by 묵호고래

저의 아내는 내향인입니다. MBTI로 본다면 INTP라고 하더군요. 저는 MBTI를 믿지는 않습니다.


저희 부부가 일본 여행에 재미를 붙이면서, 아내는 일본어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어디 학원에 다니거나 특별히 과외를 받은 것도 아닌데, 혼자서 드라마, 유튜브 콘텐츠를 보면서 열심히 공부하더니, 어느덧 JLPT 1급 자격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어깨너머로 본 성적표에 따르면 듣기 만점이 합격을 이끌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공부한 아내의 일본어 덕에, 한국에서 정보가 많지 않은 일본의 숨은 여행지들도 많이 다녀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직항이 생겼지만, 당시에는 직항이 없어 일본 국내선을 갈아타고 가야 했던 미야코지마 같은 곳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곳에 가면 한국인들이 많지 않아서인지, 현지인들로부터 더 많은 관심을 받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아내의 경우 일본어를 제법 유창하게 하다 보니, 현지인들이 “니혼고 죠즈데스(일본어 잘하시네요)”를 외치면서 더 친근함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일본에서 유학했냐며, 호들갑을 떠시는 경우도 있더군요.


최근에는 세계적으로 위상이 높아진 K컬처 덕분인지, 한국 드라마나, 작품을 봤다면서 말을 걸어오는 현지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태원클라스나 오징어게임같이 일본 현지에서 유행했던 K드라마를 화제 삼아 스몰토크를 걸어오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저희 부부는 K드라마 콘텐츠를 거의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징어게임이 전 세계를 휩쓸고 다닐 때도 넷플릭스조차 유료 결제한 적이 없었지요. 오히려 일본음악 vaundy, 히츠지분가쿠를 찾아 듣는다든지, 옛날 일본 드라마 히어로를 다시 보던가, 에반게리온을 재밌게 본 덕후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본인들이 “이태원클라스(현지 리메이크판은 롯본기클라스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를 재밌게 봤다”, “아이브를 좋아한다.” 등 호들갑을 떨 때, 맞장구를 쳐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더군다나 저희 부부 모두 내향인 이다 보니, 아내는 유창한 일본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그게 뭐죠 하하”라는 표정으로 웃어넘기고 대화가 끊어지기 일쑤였습니다.


이런 경험이 몇 번 있고 나자, 저는 이러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의 일본어 실력이 아깝기도 했고, 현지에서 한국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말을 걸어오는 일본인들에게, 민간 외교관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아내에게 대화를 이어 나가 보도록 연습을 해보자고 했습니다. 일종의 스크립트를 연습해 보자는 것이었죠. 하지만 한국말로도 잘못하는 대화가 일본어라고 잘 될 리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말로라도 ‘대화’ 연습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일본어를 참 잘하시네요, 저는 한국의 BTS, 아이브, 르세라핌을 좋아해요”라고 말하면 뭐라고 답변해야 할지 연습했습니다. 이에 대한 저희 부부의 대답은 “감사합니다. 저희도 일본문화를 참 좋아합니다. 저희는 최근에 바운디, 히츠지분가쿠의 음악을 즐겨 듣고 있습니다. 일본도 좋은 음악이 참 많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저희도 잘 모르는 주제도 대화를 어렵게 이어가느니, 일본문화도 좋아한다고 답변해 보자는 기가 막힌 전략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오키나와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운 좋게 태풍을 피해 환상적인 날씨가 이어졌던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숙소마다 친절한 직원들이 저희를 맞아주었고, 저희도 연습한 것에 따라 아주 간략한 안부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이어 나가기도 했습니다.


여행이 끝나가는 시점에, 여행의 기념이 될만한 것들을 사기 위해 마트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낯선 음식 재료나 물건들을 살펴보며 어떤 것을 사면 좋을지 열심히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현지에서 맛있게 먹었던 ‘타코라이스’ 소스를 사기 위해서, 여러 제품을 살펴보았고, 몇 가지 제품으로 후보를 압축하고 비교하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일본어 실력을 총동원하더라도, 이것이 도무지 밀키트처럼 재료가 포함된 것인지, 소스만 있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습니다. 블로그의 한국어 정보들도 열심히 찾아봤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더군요. 저희끼리 열심히 의논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한국어로, “이건 소스만 있는 것이에요”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저희가 고민하는 것을 들으셨는지, 한국어가 유창한 현지 일본 여성분께서 친절함을 베풀어 주셨던 것이지요. 저희는 감사 인사를 드리고, 한국말을 참 잘하신다는 칭찬을 건넸습니다. 여성분께서는 고맙다면서, 채소와 고기를 사서 볶으면 된다면서 간단한 조리법도 알려주셨습니다.


이때 내향인 아내는 용기를 냈습니다. 친절을 베풀어 준 일본인에게 스몰토크로 친근함을 표시해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한국말을 잘하시냐, 본인도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습니다. 이에 여성분께서는 한국에 살았었다고 했고, 아내는 일본인들이 본인을 칭찬했던 것처럼 한국에 유학이라도 다녀오셨냐 한국말을 정말 잘하신다는 호들갑이 들어간 칭찬을 건넸습니다. 이런 칭찬에 돌아왔던 그녀의 대답은 한국에서 결혼생활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인과 결혼했고, 현재는 오키나와에 다시 돌아와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또렷한 한국말로, “이혼하고 돌아왔어요”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대화를 끝으로, 여행 재밌게 하시라는 말씀과 함께 각자의 쇼핑을 이어갔습니다.


그분의 유창한 한국어 실력은, 생각보다는 일찍 마무리된 결혼생활의 어떤 유산인 셈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내의 도전은 다소 민망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여전히 저희는 일본 여행을 즐겨하고 있고, 저도 주워들은 일본어로 히다리(왼쪽), 미기(오른쪽) 정도는 구별할 수 있게 되었는데요, 아내의 일본어 실력 덕분에 재밌는 여행을 할 수 있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부부 모두 이런 내향적인 성격으로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때도 있지만, 이런 경험을 토대로 또 다른 대화 주제를 찾아 이어가 보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