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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빌리 Sep 17. 2021

친절한 민박_Day1

바르셀로나에서


 낯선 땅이란 공간과 어둠이란 시간의 조합은 여행자를 초조하게 한다. 어둠이 빛을 몰아낸 바르셀로나 어느 동네의 골목길에는 인적이 드물다. 이 시간대에 껄렁껄렁한 자세로 모여 있는 아랍인 무리를 마주하는 것보다는 안심이 되는 상황일 터다. 나는 왼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검정색 유광의 25인치 캐리어를 끌고 기나긴 오르막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 동네에만 또는 내가 밟는 땅에만 지구 중력장이 강하게 작용하기라도 하는건지 한걸음 한걸음이 무겁다. 핸드폰에 캡쳐 해 놓은 정보들을 보며 스스로에게 계속 되묻는다.   
'지금 이게 잘하는 행동이야? 
위험하진 않을까? 그냥 산츠역 근처 호텔에 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지하철 역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을 때 횡단보도 너머로 보이는 길게 이어진 오르막길을 봤을 때, 그 때라도 돌아갔어야 하는 건데...’ 

혼자 낯선 길을 걷고 있자니 생각이 많아진다. 인터넷에서 봤던 스페인의 치안에 대한 악평과 아까 산츠역 앞에서 봤던 광경이 머리 속에서 겹치며, 괜한 한기가 느껴진다.  


머리 속으로 스며드는 불안감을 밀어내려 주변 풍경으로 시야를 돌려본다. 잎이 반정도만 남아있는 가로수 아래 보도의 가장자리에는 경차들이 오밀조밀 주차되어 있다. 화려한 문양들과 아치들로 꾸며진 카탈루냐 양식의 관공서를 지나자 서서히 가정집들이 보인다. 한국의 벽돌집처럼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도 있지만 토양이 다르기 때문일까 벽돌의 색깔이 한국의 것과는 다르다. 한국의 벽돌집이 강한 채도의 적갈색이라면 이곳의 벽돌은 채도가 한두단계는 낮은 붉은 벽돌들이다. 보도는 조그마한 회색 타일로 구성되어 있다. 작은 타일 형태의 블록들로 구성된 보도의 질감이 캐리어 손잡이를 통해 그대로 전달되며 피로감을 배가시킨다.  


‘저 모퉁이까지만 가면 이 오르막이 끝날려나’ 

이 불안하고 불쾌한 상황에서 다행인 건 10월 바르셀로나의 날씨가 쾌적하고 지금까지 인터넷에서 캡쳐해놓은 민박집을 찾아가는 방법의 정보가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저 모퉁이를 돌아 10미터만 더 가면 초록색 긴 대문을 가진 3층의 가정집이 보이겠지? 

꼭 그래야 할텐데...’ 


  지하철에서 내려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까지 여유가 많진 않았다. 공항에서 짐 찾는데 걸리는 시간과 산츠역까지 이동시간을 너무 바투 계산한 탓이었다. 약속한 픽업시간에 맞춰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에 서둘러 역사 내로 올라갔다.  

픽업무료 제공!! 저렴한 가격과 함께 픽업서비스를 제공해 준다는 게 한인민박을 선택한 이유였다. 

저녁 8시 30분 산츠역에서 픽업. 약속시간 2~3분 전 가까스로 산츠역사 내에 도착한 나는 

아뿔사! 바로 당황했다.  


역 안은 크다못해 광활했고 단순히 산츠역에서 만나잔 말로 초면인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볼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역사내의 즐비한 상점과 대여섯개는 족히 넘어 보이는 출구, 그리고 공간을 채우는 유동인파들. 산츠역이란 명사는 구체적이라기보단 추상적인 언어에 가까웠다. 몇번 출구, 무슨 상점 앞이라든지 산츠역 다음에 붙는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했다. 서로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서만 연락하고 유선번호를 모르는 민박집 주인과 나는 이 상황에서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후회는 늦었고, 현지인인 민박집 주인은 픽업 정보를 왜 그렇게 구체적이지 않게 제공했을까 하는 의문만 남았다.  


역 안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검은색 캐리어와 함께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어린 시절 유원지에서 엄마의 손을 놓쳐버린 아이마냥 불안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동양인 민박집 주인을 찾아 두리번 거리고, 그가 나를 먼저 알아보고 다가와 주길 기다리는 것 뿐 이었다. 역 안을 서성이며 가급적 눈에 잘 띄는 위치를 물색했다. 가장 큰 출입구, 그래 저기가 그래도 가장 낫겠어. 역안을 서성이는 동안 어느덧 약속한 시간은 지났고 10분, 20분이 더 지나며 민박집 주인과 내가 만나게 될 확률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혹시 역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역 앞으로 나갔다. 동양인 남성이 차에서 나를 기다리는 모습을 기대하며 나갔지만, 나를 기다리는 광경은 기대와 달랐다.  


역 앞에 으레 있는 부랑자들, 건물 귀퉁이에 쪼그려 앉아 정체모를 잎을 종이에 말아 불을 붙이고 있는 사람들, 담배를 피고 있는 사람들과 그에게 담배를 얻으러 가는 이. 

그 광경을 보자 당황과 원망을 지나 이내 현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아~바르셀로나에 오자 마자 바람맞았구나. 외국나가서 한국 사람 조심하라더니 내가 딱 그 꼴이구나. 

베니스에서 바르셀로나행 비행기를 탈 때만 해도 가우디의 건물들을 볼 수 있다는 설렘으로 들떠 있었지만, 가우디는 커녕 첫날밤부터 노숙하게 생겼네. 


 
한참을 멍하니 서있다 9시가 지나고 밤이 점점 깊어지자 결정을 내려야했다. 민박집을 직접 찾아가든지 역근처 숙소를 다시 알아보든지. 
역근처의 숙소를 알아보는 일은 로밍 해 온 인터넷으로 하면 됐다. 하지만 민박비용을 이미 선불로 결제한 대다가 장기간 여행으로 경비도 빠듯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민박집을 직접 찾아가는 건, 픽업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곳을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거기까지 찾아갔는데 민박집이 없다면 외진 곳에서 호텔을 찾기도 힘들어 질 것이다. 

안전한 선택은 역근처에서 호텔을 잡는 것이고, 경제적인 선택은 민박집을 찾아가보는 것이다. 예기치 않은 상황과 점점 깊어지는 어둠에 쫓겨 조바심이 들고 시야가 좁아졌다. 누구에게 물어볼 사람도 없다. 차라리 누가 결정을 내리고 이끌어줬으면 하는 부질없는 마음이 밀려온다.  

체감상 꽤 오랜 시간을 하지만 물리적으론 길지 않았을 시간을 갈팡질팡 하다 이내 결정을 내린다. 

성인 남자가 별일 있겠어. 일단 가보자 


   세로로 길쭉한 초록색 대문이 눈앞에 보인다. 블로그 속 사진과 일치하는 큼지막한 회색돌로 바닥부분을 쌓고 연노란색 페인트칠한 벽이 이국적 정취를 풍기는 세로로 길쭉한 집이다. 정방형의 필지위에 지어진 한국의 집들과 다르게 도로를 접한 면이 좁고 내부공간이 긴 직사각형 형태의 집. 한국의 집이 정사각형 땅에 정사각형을 기반으로 한 건물을 올렸다면, 이곳의 집들은 직사각형 땅에 직사각형 건물을 올렸다. 직사각형의 집들이 촘촘히 나열된 주택가는 내가 낯선 땅에 와있는 이방인이란 의식을 다시 각성시켰다. 
어찌되었든 목적지에 도착했단 안도감에 긴장이 풀렸다가, 민박집 주인을 만날 생각에 불현듯 머리가 지끈거린다. 민박집 주인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자초지종을 들어볼까 아니면 여기까지 혼자 캐리어를 끌고 오게 한 분을 담아 따지고 들어가기부터 할까. 


뭐가 됐든 일단 쉬고 싶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초인종을 누른다. 

띵동~ 

오래지 않아 집안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대문쪽으로 발걸음 소리가 다가온다. 
끼이익 녹색철문이 열리고 문을 열고 나온건 까무잡잡하게 탄 피부의 20대 남자였다. 민박집 주인이 이렇게 젊다고? 
"오늘 예약하신 분이시죠? 안으로 들어오세요. 
안그래도 권사범님이 걱정하시더라고요." 
남자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가자 주방에서 40대 후반에서 50대초반으로 보이는 마른 남자가 활짝 웃으면서 나온다. 피부는 지중해의 강한 햇살과 무관하게 평범한 동양인의 빛깔이고, 윗머리가 듬성듬성한 대머리의 남자, 푸석푸석해서 어딘가 생기가 부족해 보이는 낯빛이 만면의 미소와 대조적이다.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와 대뜸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고는 
" 잘 찾아왔네요. 내가 여기 민박집 주인이고 그냥 권사범이라고 불러요.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걱정했어요. 
내가 차 수리를 맡겨가지고, 산츠역에서 만나서 같이 지하철 타고 올까 했는데 연락할 방법이 있어야지. 예약한 방에 다른 손님은 없으니 혼자 쓰면 되고 피곤할텐데 짐 풀고 요기하고 싶으면 옥상으로 올라와요. " 
"아...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물어보거나 따질 겨를도 없이 웃음과 악수와 일방적인 설명에 금세 수긍해버리고 마는 나였다. 

2층에 있는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문을 열어준 까무잡잡한 청년이 캐리어를 들어주며 따라 올라온다.  

"전 재희라고 해요. 형 건너편 방에서 지내고 있고 여기 있은지 꽤 오래되서 고인물이랄까... 궁금한 거 있음 물어보세요." 
"고마워요" 
초면에 대뜸 형이라니...흠, 그런 아이구나 하며 도움을 받아 방에 들어온다.  


하얀색 벽의 방에는 싱글사이즈의 회색 철제프레임 침대 두개와 그 위에 하얀 침구류, 간단히 옷을 걸만한 이동형 행거가 놓여있다. 무채색 구성과 미니멀한 가구가 다소 휑한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3일 묶을 여행객에게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공간이다.  

재희가 방에서 나간 것을 확인하고는 피로와 긴장에서 벗어난 나는 침대에 풀썩 주저앉고는 이내 몸을 뉘였다. 벽과 같은 하얀색 천장에 쨍한 형광등 빛을 보고 있자니 잠깐의 현기증이 밀려온다.  

방문 밖으로는 주방에서 나오는 것 같은 금속과 나무가 부딪히는 소리와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인기척이 어렴풋이 들려온다. 간헐적인 소리들이 마치 자장가처럼 온몸의 긴장을 녹이며 처음접한 침대에 빨려 들어가기라도 할듯하다.  

‘ 2인실을 혼자 쓸 수 있다니, 이 정도면 전화위복인가 

여기까지 찾아오길 잘 했어. 

그런데, 지하철 타고 같이 오는 게 픽업인가?' 

혼자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문득 배 속 허기를 느낀다. 바르셀로나 오는 비행기 타기 전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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