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최대의 퀘스트
마흔 플러스 알파의 누군가에겐.
결전의 날이 다가온다. 딸아이는 사랑하는 NCT오빠들의 콘서트를 보러 서울의 올림픽 체조 경기장을 가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기 전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도 콘서트 표를 못 구해 울고불고 좌절하던 아이가 용케도 취소표를 구한 것이다. 딸아이는 밴드부 건반 연주자이다. 아이는 동아리인 밴드부 연습을 빠지지 않고 다녔지만, 요즘엔 중학교 때부터 입시공부가 치열한지 함께 하던 친구들은 우수수 다 떨어져 나가고 후배들만 남았다. 새로 들어온 밴드부 동생도 NCT를 좋아하는지, 같이 콘서트를 가자고 해서 신이 났다.
그런데 돌아오는 차편이 문제다. 공연은 7시에 시작하니까 9시 반은 되어야 끝날 터였다. 공연이 끝나고 터미널로 가서 시외버스를 타기엔 막차 시간도 애매했다. 남편은 자기가 데리고 가서 데려 올 테니 걱정 마라며 딸아이에게 장담을 했다.
그 다음날 나도 모임 있다. 작가 수업을 같이 들었던 100명이 넘는 동기들을 오프라인에서 처음 만나는 모임이었다. 글쓰기 선생님은 세심하게도 먼 지역에서 오는 나 같은 지방러들을 위해 서울역 근처로 모임 장소를 정해 주셨더랬다. 금요일, 토요일 매일 서울을 왕복할 수 는 없으니 가족 여행 삼아 온 가족이 함께 출동해서 숙소를 잡고 토요일 스케줄까지 마치고 돌아오기로 했다. 둘째 날 내가 모임 하는 동안에는 서울숲에서 산책하며 기다리면 되겠다는 디테일한 계획까지 다 세워두었다.
그런데 하필 토요일 오후 2시에 남편 손님이 차를 받으러 온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카딜러다. 함께 교회 생활을 오래 해온 형제님의 아들이 이번에 서울에 취직을 하고 새 차를 뽑았는데, 그날 결혼식이 있어서 등록과 썬팅까지 마친 차를 가지러 온다는 것이었다. 초보도 그런 초보가 없는 생짜배기 초보에게 밤에 차를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돌아오는 기차표를 검색해보았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직통의 차편은 없지만 환승해서 오면 내가 사는 지역 근처의 역에 내려 돌아올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남편은 내가 천안아산역 까지만 오면 1시간 20분을 달려 데리러 온다고 했지만 서울에서 올 때도 장거리 운전을 할 남편에게 또 그까지 멀리 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날 저녁에 교회 활동 모임이 있는데 본인이 사회를 봐야 할 수도 있단다. (아주 그냥 끝이 없구만.)
괜시리 짜증이 났다. 무려 5주 전부터 이 모임이 있다고 이야기 했고, 드레스 코드가 블루라 블루 아이템이 필요하다며 딸아이와 소라색 겨울 머플러까지 10대 20대들의 핫한 쇼핑몰인 무려 ‘에이블리’에서 샀는데, 스케줄이 꼬여도 이렇게 꼬이다니.
결혼하고 두 아이를 키우며 15년을 살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뭔가 어려워졌다. 귀찮아서가 아니다. 말 그대로 어렵다. 잘 모르는 타지에서 터미널이나 기차역을 혼자 찾아갈 자신이 별로 없다. 심지어 서울 성모병원에서 엄마가 어깨 수술을 받으셨는데, 수술날은 직장에서 조퇴하고 가서 입원절차를 마치고, 수술도 잘 마쳤지만 다음날 아침은 첫 차를 타고 내려와 출근을 해야만 했다. 서울의 고속버스 터미널은 얼마나 크고 넓던지, 그리고 병원에서 가는 길이 지하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새벽에 한눈에 찾아갈 자신이 없었다. 딸아이가 그 병원에 2주가량 입원한 적이 있었고, 집으로 돌아올 때도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왔던 기억이 있건만 말이다. 다음날의 무사한 출근을 위해 밤 11시 반에 병원에서 고속버스터미널까지 가서 버스를 탈 지점을 확인하고 돌아와서야 마음편히 잘 수 있었다.
원래 나는 심각한 길치다. 공간 감각이 다른 사람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처음 가는 카페에서는 출구를 헤매서 못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왜 이토록 익숙하지 않은 길, 특히 초행길에 대해 두려움이 있는지 그 연유를 알 수 없어 며칠간 마음이 답답했다. 나이 사십이 넘어 혼자서 어딜 다니지 못한다는 건 심각한 일 아닌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수는 없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불현 듯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첫 소풍날이 떠올랐다. 생일이 1월이라 일곱 살에 학교를 들어갔더랬다. 봄소풍으로 시내버스를 타고 남강 다리 밑에를 다녀왔는데,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갑자기 선생님께서 알아서 내려서 혼자 집을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아직은 아는 풍경들이 스쳐 지나가는데, 언니 오빠 없이 시내버스를 탄 건 처음이라 불안했다. 언제 아는 풍경이 끝나버릴지 말이다. 그래서 ‘여기는 익숙한데...’ 싶은 곳에서 버스에서 내렸다. 그렇다. 그곳은 내가 집으로 가는 방향이긴 했지만 내려도 너무 빨리 내렸다. 어른 걸음으로 빠르게 30분은 걸어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정도의 다른 동네였다.
다행히 점빵 하나를 찾았고, 주머니에 뒹굴던 동전도 몇 개 찾았지만, 공중전화기 수화기에 손이 닿지 않았다. 극도로 내성적인 나였지만,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얼른 집에 연락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에게 집을 잃어버렸는데 수화기에 손이 닿지 않으니 집에 전화를 좀 걸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한 30분을 기다렸을까. 엄마가 자전거를 타고 나를 데리러 오셨다. 집을 잃어버렸는데, 기특하게 잘 해결했다고 얼마나 큰일날 뻔 했냐고 칭찬해주고 안아주실 줄 알았다. 그런데 엄마는 왜 집을 못 찾아와서 여기까지 데리러 오게 만드냐고 화를 내셨다. 예상치 못한 엄마의 차가운 태도에 아무 말도 못하고 얼어버렸다. 아무 말 없이 자전거 뒤의 안장에 앉아 엄마 허리를 꼭 붙잡고 오는데 가슴속이 울렁거렸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너무 빨리 철이 들어버렸다.
마흔이 넘어 하루는 엄마에게 그때 그 일이 참 서운했다고 얘기했더니 엄마는 전혀 기억을 못하셨다. 내가 그렇게 말 했었나며 미안하다고 하셨다. 알 수 없는 병으로 수족을 쓰지 못하게 된 남편을 돌보며, 세 아이를 키우고, 돈을 벌어야 했던 우리엄마는 얼마나 삶이 고단했길래 7살짜리 딸이 집을 잃었다가 돌아왔는데 딸을 반길 힘도 없었던 것 일까하고 그제서야 마음이 아팠다.
가족을 이해하는 일은 때로는 몇 십 년이 걸리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각자의 상황, 각자의 역할 속에서 우리는 다른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사실은 서로를 엄청나게 사랑하면서도 폐 끼치지 않으려, 상처주지 않으려 노력하다가 오히려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나도 남편을 배려한다면서 결국엔 나에게 맞춰주지 않음을 서운해 하지 않았던가.
집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역을 두고도, 번거롭게 환승하지 말고 천안아산역 까지만 오면 데리러 온다던 남편이 문득 고마워진다. 때로는 남의 편인 것만 같아 서운하다가도 이럴 땐 하나밖에 없는 영원한 내 짝꿍이다 싶다. 그걸 항상 한 템포 늦게 깨닫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 퀘스트: 온라인 게임에서 이용자가 수행해야 하는 임무. 게임 전체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요소로, 임무를 달성하면 보상이 주어진다.
* 점빵: 가게를 일컫는 경상도 사투리. 특히 동네의 구멍가게를 지칭하는 말로 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