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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소 Jun 27. 2021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 : 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의 『얼어붙은 여자』는 작가 스스로 소설로 명명한 마지막 작품이다. 실제로 『얼어붙은 여자』 이후 출간된 아니 에르노의 작품들은 오로지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만을 글로 쓴다는 점에서 독특한 지점을 갖는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쓴 세번째 작품인 『얼어붙은 여자』 를 소설로 명명했지만, 독자들은 모두 자전적인 이야기로 읽었다는 사실은 인상깊게 다가온다.

아니 에르노의 『얼어붙은 여자』는 어린 소녀가 한 남자의 아내, 그리고 아이의 엄마가 되며 서서히 ‘얼어붙은 여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소설 속 ‘나’는 작은 상점 겸 카페를 운영하면서 자연스럽게 집안일과 바깥일을 공유하는 부모를 보며 자란다.

내 아버지는 아침에 출근하지 않고, 오후에도, 아니 결코 집을 나가지 않는다. 아버지는 집에 있다. 아버지가 커피와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하고, 요리하고, 채소 손질을 한다. 한쪽에는 남자들의 길이 있고, 다른 쪽에는 여자들과 아이들의 길이 있지만,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같은 흐름 속에서 같이 산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P. 23

가정적인 어머니와 권위적인 아버지를 둔 친구들과는 다르게 ‘나’의 부모는 아이에게 여성스러움을 강요하지 않으며 책을 읽고, 문화 생활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하지만 학교를 다니고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며 마주하게 된 세상에서는 각자 성별에 따라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중요했고, 그에 따른 차이와 차별이 만연한 공간이었다.

나는 자유라는 직선을 좋아하지만, 단 한 번도 그 직선으로 똑바로 걸어가지 못한다. P. 138

자유를 꿈꾸고 사랑을 갈망하며 몽상하기를 좋아하던 소녀는 보수적인 성향의 학교에서 ‘여성을 위한 공부와 남성을 위한 공부가 따로 있음을 알게 되는’ 편협한 교육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나’는 편협한 사회 안에서 자신만의 존재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한 남자를 만나 결혼과 출산, 양육의 과정을 통해 남성과 여성에게 규정된 역할의 차이를 다시금 확인하게 되며, 조금씩 얼어붙어간다.

내 성과 이름, 천천히 쓰는 법을 배웠고, 아마 부모님이 제대로 철자를 쓰라고 강요했던 첫 번째 단어, 가는 곳마다 내가 나라고 의미해주던 단어, 벌을 받을 때 크게 울리고, 성적표 위에서,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받은 편지들에서 반짝이던 단어, 이런 내 이름이 단번에 녹아버렸다. 더 둔탁하고 더 짧은 남편의 이름을 들을 때, 나는 그 이름에 적응하기 위해 몇 초간 망설인다. 한 달 동안 나는 두 개의 이름 사이를 떠다닌다, 고통은 없고, 단지 낯선 느낌이 들뿐. P. 177

소설의 말미에서 얼어붙은 여자의 공허한 얼굴이 그려지는 가운데, ‘옮긴이의 말’을 읽으며 깨달았다. 우리는 끝까지 그녀의 이름을 알 수 없다. 이는 역자의 말처럼 ‘누구나 얼어붙은 여자가 될 수 있고, 얼어붙은 여자의 이야기는 모든 여자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소설의 시대적인 배경에서 오랜 시간이 흐른 오늘날에도 우리는 소설 속 ‘나’의 삶에 비친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소설 『82년생 김지영』이 떠오르기도 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남녀 간의 차이와 불평등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유와 평등의 나라’라고 생각해온 프랑스에서도 ‘얼어붙은 여자들’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해왔다.

결혼을 하고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로 살아가며 조금씩 자신의 이름과 삶이 희미해져가는 것을 깨닫고 서서히 얼어붙는 여성들. 우리는 자신의 삶이 잠식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고 존엄하며, 자유로워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 앞에서 우리는 왜 늘 항상 약해질 수밖에 없는걸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고 찾아가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서로 끊임없이 대화하고 연대하며, 여성과 남성이 아닌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가야 할 이 세상의 수많은 ‘나’의 이름을 잊지 않고, 기억했으면 좋겠다.


*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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