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고 싶을 때 읽으면 좋은 책으로 백수린 작가님의 『다정한 매일매일』에 대해 얘기했는데요.
오늘은 작가님의 소설집 『여름의 빌라』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름의 빌라』에는 총 8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요.
백수린 작가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쓸쓸함과 먹먹함이 마음 깊이 와닿는 책입니다.
우리 앞에 그어진 선을 지운다는 것
내가 망설이던 사이, 캄보디아 소년 앞에 섰던 레오니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자신의 발로 레오니와 소년 사이에 그어진 선을 지우는 게 아니겠어요?
레오니는 돌멩이 끝으로 소년의 뒤쪽에 새로운 선을 다시 그었습니다.
그러고는 "집에 새 친구가 왔으니 원숭이님이 더 좋아하겠지?"하고 나에게 말을 했어요. (중략)
하지만요, 베레나, 이것만큼은 당신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당신의 기억이 소멸되는 것마저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순리라고 한다면
나는 폐허 위에 끝까지 살아남아 창공을 향해 푸르게 뻗어나가는 당신의 마지막 기억이 이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딸이 낳은 그 어린 딸이 내게 그렇게 말한 후 환하게 웃는 장면이요.
백수린, 『여름의 빌라』, 「여름의 빌라」, P. 71, 문학동네
이국에서 만난 외국인 부부와의 문화적 차이, 그로 인해 빚어진 갈등과 그들의 손녀를 통해 건네는 따뜻하고 환한 웃음까지 「여름의 빌라」에는 하나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수많은 이야기 거리와 감정들이 담겨있습니다.
어른이 되어가며 자신이 속한 세계 내에서 서서히 굳어져가는 생각과 가치들은 때때로 타인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방해물이 되기도 합니다.
나와 당신, 우리는 서로 다르기에 궁극적인 의미에서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어른들 틈에
천진하게 웃으며 자신과 소년 사이에 그어진 선을 지우고 그들이 함께 있는 공간 뒤쪽으로 선을 긋는 레오니의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른 이와 함께하며 맞게 되는 소소한 기적
난생처음 맛보았던 그 황홀하도록 달콤한 맛.
그 기억에 대해서도 브뤼니에 씨에게는 영원히 말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낯선 섬에 홀로 표착한 것 같았던 할머니의 일생이나,
하루가 너무 길 때마다 차라리 빨리 죽여달라고 신에게 간구하지만,
막상 죽음 이후를 상상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극심한 공포에 대해서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듯.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습게도 느닷없이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들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주는 즐거움. 계획이 어그러진 순간에만 찾아오는 특별한 기쁨.
다 잃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어느새 한여름의 유성처럼 떨어져내리던 행복의 찰나들.
그리고 할머니는 일어나서 브뤼니에 씨와 함께 탑 위에 각설탕 하나를 더 쌓았다.
하나를 더. 또 하나를 더. 그러다 탑이 무너져내릴 때까지.
각설탕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할머니와 브뤼니에 씨가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릴 때까지.
백수린, 『여름의 빌라』, 「흑설탕 캔디」, P. 201, 문학동네
노년의 사랑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생각들을 떠올려봅니다.
할머니는 자신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브뤼니에 씨와의 관계에 대해서 어떠한 말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도 타인과의 만남은 여전히 설레고 아름답습니다.
작은 일에도 웃음을 터뜨리고, 가슴이 설레고, 마음이 아파옵니다.
우리의 몸은 하루하루 나이 들어가지만 마음은 변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분께 소개해드릴 '여름에 읽으면 좋은 책' 두번째 도서는
김애란 작가님의 소설집 『바깥은 여름』 입니다.
김애란 제가 개인적으로 한국 작가분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가님 중 한 분인데요,
『바깥은 여름』에는 소중한 사람을 잃거나 어떤 시간을 영영 잃어버린 채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입동」이라는 작품이 참 많이 기억에 남았었는데요,
사고로 아들을 잃은 젊은 부부가 아들에 대해 그리워하고 많이 아파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 소설입니다.
우리는 그 사 인용 식탁에 둘러앉아 매일 밥을 먹었다.
드물게 손님이 오면 거실에 상을 폈지만 우리끼린 대개 식탁을 이용했다.
우리 부부는 등받이가 없는 벤치형 의자에, 영우는 유아용 접이식 식탁 의자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 걸 배웠다.
김애란, 『바깥은 여름』, 「입동」, P. 20, 문학동네
당신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내 앞에 놓인 말들과 마주하자니 그날 그곳에서 제자를 발견했을 당신 모습이 떠올랐다.
놀란 눈으로 하나의 삶이 다른 삶을 바라보는 얼굴이 그려졌다.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편지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두 손으로 식탁 모서리를 잡았다. 어딘가 기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혼자 남은 그 아이야말로 밥은 먹었을까. 얼마나 안 먹었으면 동생이 꿈에까지 나타나 부탁했을까.
참으려고 했는데 굵은 눈물방울이 편지지 위로 투둑 떨어졌다.
허물이 덮였다 벗어졌다 다시 돋은 내 반점 위로, 도무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얼룩 위로 투두둑 퍼져나갔다.
당신이 보고 싶었다.
김애란, 『바깥은 여름』,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P. 266, 문학동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바깥은 여름』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글입니다.
삶이 삶에게로 뛰어든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쩌면 여름만큼 생명력이 강력하게 느껴지는 계절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여름의 이미지와 대조적으로 먹먹하고 마음 아픈 이야기로 채워진 두 책을 보며 조금은 마음이 묵직해지고 가라앉을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책을 읽고 많은 것을 사유하고, 되돌아보며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삶의 방향, 그리고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삶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