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석 연휴의 끝에서 오늘날 '전설'이라 불리는 예술가 33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예술가의 일』을 읽었다.
33인의 예술가는 '경계를 지우고 먼 곳으로' '우직하게, 천천히, 한 걸음씩' 걸어가며, '아물지 못한 상처'를 지닌 채 '전쟁터에 내던져진 싸움꾼처럼' 살아갔으나 결국 '고독마저 그들에겐 재료였을 뿐', '예술과 삶이 만나는 시간'을 통해 우리의 삶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보위가 떠난 직후 아케이드 파이어는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추모 퍼레이드를 열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보위를 기억했다. (중략) 아케이드 파이어는 보위의 대표곡 <Heroes>를 불렀다. "우리는 영웅이 될 수 있어, 단 하루만이라도"라는 가사가 반복해서 울려 퍼졌다. 평범한 사람들의 지루한 삶을 어루만지는 이 메시지 속에서 관중은 춤을 추고 환호성을 질렀다. 모두 행복한 얼굴들이었다. 추모제보다는 축제였다. 지구에 찬란한 기운을 선물하고 저 먼 곳으로 떠난 영웅에게 건네는 아름다운 작별 인사였다. p.23
밀러는 좌절하고, 분노하고, 불안에 사로잡혔지만 다시 길을 찾고 앞으로 걸었다. 이 모든 과정을 교향곡 10개에 담았다. 그의 음악은 앞으로도 계속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제대로 전진하고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돌아보면 길을 잃은 것 같은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불안, 불행,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없다. 롤랑 바르트가 적었듯이 "누구나 자기만이 알고 있는 아픔의 리듬"이 있다. 아픔의 리듬 속에 갇힌 날, 그런 날엔 피난처라고 생각하고 밀러의 음악에 도전해보자. 무언가가 들릴지도 모른다. p.35
음악, 문학, 그림, 춤, 영화의 주요 관심사는 언제나 사랑이었다. 그래서 사랑을 말하는 예술을 진부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가장 진부한 것이 가장 중요할 때도 있다. 삶이 불행으로 가득하고 또 언젠간 끝나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진부한 사랑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소나기가 내릴 것 같은 날 우산을 챙겨주는 연인, 끼니를 제때 먹었는지 걱정해주는 가족. 이런 소소한 사랑 덕분에 인간은 비극에 파묻히지 않고 희극을 개척해나간다. '사랑의 화가' 샤갈이 그랬던 것처럼. p.109
간결하고 따뜻한 문체로 가득한 책을 읽으며 내 삶 속에 자리한 예술가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봤다. 만우절에 세상을 떠난 장국영의 거짓말같은 부재,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인 박남옥 감독을 보며 꿈을 키워가던 대학 시절, 몇 해 전 겨울 샤갈의 전시회를 보고 난 후 걸었던 돌담길 등. 그들은 언제고 나의 시간 한 켠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비록 고단하고 지루한 삶이 이어지더라도, 그 삶을 이어가기 위해 걷고, 또 걸으며 조금씩 나아가는 그들과 닮은 우리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생을 통해 끊임없이 사유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예술가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