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틸 수 없는 기억 - 맨체스터 바이 더 씨 2016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우리는 아픈 이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그들은 시간이 빨리 흘러 아픈 상처가 조금씩 아물기를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차마 위로조차 할 수 없는 아픔이 있고, 그래서 평생 그 아픔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에게 시간의 흐름은 그저 아픔과 함께 하는 시간 일 뿐이다.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픔을 겪은 후 고향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떠났던 남자 '리'가 형의 부고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수년 전 이곳에서 있었던 그 아픈 기억과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건물의 잡역부로 일하며 반지하 집에서 혼자 살고 있는 리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람을 대할 때의 말투, 어디를 바라보는지 모를 흐릿한 시선, 힘겨운 걸음걸이 등 생기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시체 안치실에서 형을 봤을 때조차 울지 않고 조용히 차가운 형의 시신을 한번 안아주고 돌아선다.
형의 유언으로 조카 패트릭의 후견인이 되지만, 리는 조카와 함께 다시 이곳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 살자신이 없다. 학교, 친구들, 아빠가 물려준 배 등 모든 기반이 있는 패트릭은 이곳을 떠나기 싫다고 한다.
현재의 시점에서 중간중간 플래시 백으로 보여주는 과거 속의 리는 아내와 어린 세 자녀와 평범하지만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고, 가끔 형과 조카 패트릭화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낚시를 하기도 한다.
이런 평범한 시간은 어느 날 밤 끔찍한 리의 실수로 모든 게 사라졌고, 그날 이후 리의 삶도 완전히 무너졌다.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아픔과 슬픔은 종종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래서 더 감당하기 어렵고, 쉽게 드러내지도, 스스로 떨쳐내지도 못한 채 마음 한편에 남겨진다.
그런 리에게 그나마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고향을 떠나 마음의 문을 잠그고, 과거를 잊으려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거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를 위로하지 못했고, 형조차도 고향을 떠나는 그를 조용히 안아줬을 뿐이었다.
차마 위로조차 할 수 없는 아픔이었기 때문에..
리는 경찰서 조사실에 앉아 사고 관련 조사를 받는다.
그날 밤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리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보인다. 말은 하고 있지만 영혼은 이미 죽어버린 듯 힘겹지만 담담하게 얘기하던 리는, 수사관이 이제 되었으니 가보라고 하자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 이게 다예요?.. 그냥 가도 돼요?..'
하지만 도저히 자기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던 리는 천천히 조사실을 걸어 나간 후 지나가던 경찰이 차고 있던 권총을 순식간에 뽑아 들고 자신의 머리에 겨눈다.
순식간에 경찰서는 아수라장이 되며, 그를 제압하려 달려드는 사람들 틈에서 리는 쓰러지며 힘겹게 외친다.
'Please..'
주인공 리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픔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리가 겪은 비극의 크기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는 이미 형벌이 되어버렸음을 보여준다.
그가 내뱉은 한 단어, ‘Please.’ 그것은 죽게 내버려 두라는 말이 아니라, 더 이상 살아 있을 수 없다는 고백처럼 들린다.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상처의 회복을 얘기하지 않는다.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할리우드식 결말이 아닌, 아픔을 가진채 평생을 살아가는 현실적인 삶을 보여준다.
물론 어떤 아픔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아픔은 남은 삶동안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이들에게 섣부른 위로는 어찌 보면 더 큰 상처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주인공 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끝까지 보여준다.
여전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지만 그만의 방식으로 그 아픔과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존중하며 조용히 응원한다.
영화 후반, 리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떠나기 싫어하는 패트릭을 위해 이곳에서 생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고, 자신은 돌아간다고 말한다.
그러자 패트릭은 그런 삼촌에게 같이 있으면 안 되냐고 묻는다.
'I can't beat it.. I can't beat it.'
주인공 리의 이 한마디는 영화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리의 모든 감정을 보여준다.
평생 지워질 수 없는 아픔이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래서 그런 채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버틸 수 없는 이곳에선 도저히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
시간이 흐르며 희미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한쪽으로 밀어두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어떤 계기로 그 기억이 다시 떠오를 때, 우리는 다시 그 시간 속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아파한다.
그것은 나약해서도, 의지가 부족해서도 아니다.
좋은 기억을 억지로 지울 수 없듯, 아픔의 기억 역시 그러하다.
주인공 리처럼,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 아픔과 함께 살아간다.
영화의 마지막, 꽁꽁 얼어붙어 있던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 결국 봄이 찾아오듯,
시간은 흐르고 삶은 계속된다.
그저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애쓰고 있는 우리에게 조용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