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으로만 일하는 개발자가 불필요할까요?
회사에 다니면서 한창 개발을 할 때도 여러 사람을 관리하는 것보다 개발하는 게 훨씬 속 편하고 쉽다고 생각은 했었습니다. 밤, 주말까지 붙잡고 있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면 가끔 개발자로서 현타가 오기도 했지만 그래도 저한테는 개발 일이 제일 잘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니던 회사에서는 신사업이나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R&D에만 참여를 하다 보니 대리 막바지 연차가 되었을 때는 실력이나 경력/경험으로 회사에 제가 내세울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또 제 개발 실력이 정말 별로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애초에 저는 사업에 관심이 있었지 계속 회사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일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마침 일하던 사람들도 퇴사하고, 속해 있던 부서도 사라져서 인수인계를 할 필요도 없던 타이밍에 회사에 퇴사 의사 표시를 했고, 3일 만에 백수가 되었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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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최근 1~2년 사이에 있었던 일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큰 변화는 사업을 하면서 다른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스타트업에 일주일 1~2회 정도 출근해서 개발 관련 일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회사를 다닐 때는 해보지 않았던 관리를 퇴사해서 하고 있는 겁니다. 당연히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리딩 하고, 일을 주고, 일정을 관리하고, 대표님들과 조율하면서 결과를 만들어 내야 했습니다. 게다가 아직도 개발자 습성을 버리지 못해서 어떤 일을 생기면 직접 해버리려는 생각부터 합니다.
그리고 1년 사이에 지금 일하는 곳까지 두 곳의 스타트업 회사에서 일을 했습니다. 의도적으로 절대 개발은 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월급을 받으면서 직접 개발을 할 때도 썩 좋지 못한 결과를 만들었었는데 더 나이 먹은 지금 직접 해보려고 해 봤자 회사에서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는 없을 테니까요. 저보다 개발을 더 잘하는 친구들이 일을 하게 만들어야죠. 처음 생각한 것처럼 개발자들을 관리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관리 일을 하면 할수록 개발보다 훨씬 저에게 잘 맞고, 재미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회사에서 주는 돈만큼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저와 일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저보다 개발도 잘하고, 새로운 기술에 대한 이해도 빠르며, 욕심도 있습니다. 제가 개발을 하면 오히려 방해가 될 겁니다. 이번에 계약을 맺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에 정말 확실하게 개발자와는 연을 끊고, 관리자로 변신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게 맞는 게 회사에서도, 저와 일하는 개발자들도 그걸 원하고, 절실하게 필요로 합니다.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어려움을 토로하는 신입 개발자들이 많습니다. 게다가 스타트업에서는 개발자 출신이 아닌 대표님들이나 상사와 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들과 대화하는 건 훨씬 더 어려울 겁니다. 게다가 대화 상대방의 직급에서 오는 압박과 개발자로서 부족한 경험으로 인해 올바른 상황 파악과 결정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개발자들은 그저 개발만 하고 싶어 합니다. 회사의 비전, 일정, 자본, 영업은 당연하고, 문서 작성이나 발표, 회의도 정말로 싫어할 겁니다. 그래서 만약 이런 것들을 대신해주고 일정을 조율해주고, 할 일을 결정해서 지시해주는 선임이 있다면 개발자로서 정말 마음 편히 일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니 이건 당연한 겁니다. 문제는 회사라는 곳은 개발만 해서는 안 되는 곳이라는 점입니다. 특히나 일정, 협의, 어떤 사안의 대한 결정은 개발자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회피할 수 없는 회사의 중요한 일입니다. 스타트업 회사와 같은 소규모 회사에서는 신입 개발자라고 하더라도 단순히 개발만 하기가 어렵습니다. 대표한테 직접 일을 받게 되고, 일정과 결정을 강요받고, 계속 회의와 외부 활동에 불려 나갑니다. 신입 개발자로서는 혼란스럽고, 짜증 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일들을 대신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개발자 출신이라면?
신입 개발자 입장에서는 자신과 같은 일을 해본 사람이기 때문에 대화하기가 수월하고, 비 IT 출신의 대표님들 입장에서도 개발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 신입 개발자와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이해하고, 의사 결정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직접 개발을 하는 것보다 입으로만 일을 하는 게 지금 제가 다니는 회사에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도 한계는 있습니다. SI 중소기업에서만 일을 했었던 입장에서 스타트업 회사보다 더 큰 기업에서의 관리는 아마 제 역량을 벗어나는 일일 겁니다. 전 세계의 모든 회사들이 개발자들을 구하기 위해 엄청난 조건을 제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항상 시간과 돈이 부족한 영세한 스타트업 회사 입장에서는 개발자 한 명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경력 있는 개발자/관리자라면 더 어렵겠죠. 그런 상황에서 제가 반사 이익을 약간 누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떻습니까? 저는 새로운 경험을 하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역량과 경력이 늘어나고 있는데 고정적인 수익도 생깁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저라도 필요로 하는 스타트업 회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마침 비전공자, 예비 취준생을 상대로 IT 컨설팅도 하고 있어서 규모가 작은 스타트업 회사에서도 얼마든지 자신 있게 입을 열 수 있고, 제 입에서 나오는 내용을 회사에서도 필요로 합니다. 일주일에 1~2회만 출근하면 되기 때문에 기존이 제 사업에 큰 지장도 없습니다. 기껏 퇴사해놓고 다신 남의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