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soceo Aug 31. 2023

을처럼 일하는 갑

"갑질" 말고 "을질"은 없나?


제가 다녔던 회사는 중소 IT 기업으로 SI 분야에 속한 솔루션 업체였습니다. 개발자들이 IT 계의 3D라고도 불리는 분야로 고객 기업사에 솔루션을 납품하고, 해당 회사로 파견을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일이 많고, 야근이 잦아서 힘든 경우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흔한 일이라서 일로써 넘어갈 수는 있지만 파견을 나가는 고객사의 담당자나 회사 자체가 갑질을 하는 경우에는 이야기가 좀 달라집니다. 퇴사로 이어지거나 담당자 변경, 심하면 회사 간의 갈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갑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을이 양보하거나 손해를 감수하는 걸로 결론이 납니다.

이렇게만 이야기를 하면 "고객사는 갑질한 거고, 파견 나가서 일하는 직원은 힘들겠다... 역시 갑... 갓갑..." 이렇게 말들이 나오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그런데 모든 경우가 그렇지도 않은가 봅니다.

저한테 교육을 받고 있는 분 중의 한 분이 외국계 회사 IT 담당자인데 그 회사는 미국에 상장도 되어 있고, 여러 국가에 지사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지사의 IT 관련 업무는 대부분 한국의 여러 솔루션 업체에 외주로 맡겨서 운영하고 있는 전형적인 갑의 위치에 있는 회사입니다. 저한테 교육을 받고 있는 분은 그런 외주 업체를 관리하는 갑의 IT 담당자입니다.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7548/clips/223


저한테 교육을 받고 있는 그분은 갑의 회사에 직원이자 IT 담당자로서 국내의 외주 기업을 관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분뿐만이 아니라 외주 업체의 솔루션을 사용하고 있는 모든 갑의 직원들이 을의 담당자 한 명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고 있다는 겁니다! 을도 아니고 왜 갑이 을의 담당자 한 명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까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1. 갑의 담당자와 사용자 모두 IT, 특히나 개발 영역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2. 갑의 담당자의 이직률이 높고, 연차가 높지 않다.

3. 을의 담당자는 전형적인 개발자로 모든 대화를 IT적으로 한다.

4. 을의 담당자의 연차가 갑의 담당자보다 높다.

5. 을의 담당자가 갑의 담당자보다 솔루션/업무적으로 더 많이 알고 있다.


(더 많이 쓰고 싶지만 일단 이 정도만....)


이유는 정말 많은데 결국 그 이유들은 모두 서로 엮여 있습니다. 갑의 IT 담당자 포지션은 IT 경력이 있는, 최소 대리/과장급 정도의 인력이 맡아야 되는데 연봉은 높지 않고, 영어까지 가능한 IT 경력자이다 보니 적임자를 오랫동안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렵게 구해도 곧 더 좋은 회사로 이직을 해버리다 보니 연차가 많지 않아도, 영어만 가능하면 IT 전공/경력/지식 여부와는 상관없이 직원을 새로 뽑아 담당자로 배정을 한 겁니다. 여전히 이직률은 높겠죠...


그에 반해 을의 담당자는 개발자이고, 고객 응대를 해야 되기 때문에 직급도 경력도 꽤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을이지만 자기보다 연차도 낮고, IT 지식도 없는 갑의 담당자를 다루는(?) 데 있어서 크게 어려움이 없는 겁니다. 게다가 갑의 직원이지만 갓 입사한 상황이다 보니 오히려 다른 회사인 을의 담당자가 갑의 업무는 물론 히스토리에 대해서도 더 잘 압니다. 을의 담당자가 정말 악독하거나 그렇지 않고 조금이라도 약은 사람이라면 이처럼 쉬운 고객사도 없을 겁니다. 갑의 담당자로서 을의 담당자한테 요구/요청/지시를 해도 명확하지 않고, 말발도 안 되고, 연차/연륜도 부족하다 보니 갑이지만 을의 담당자를 설득해서 일하게 만들기가 쉽지가 않을 겁니다.


을의 담당자가 밑도 끝도 없이 "No"라고 해도 갑의 담당자가 반박을 하거나 따지질 못하니 갑의 담당자는 끙끙 앓기만 할 뿐 방법이 없으니 본인이 혹은 갑의 직원들이 불편함을 감수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해도 갑에서 아무런 항의도 없으면 을은 좋다 하고 그 상황을 즐길 겁니다.


그럼 이런 상황에 대해서 을에 해당하는 회사에서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 상황을 모르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알면서 쉬쉬하고 있는 걸까요? 몰랐다가 알게 되면 을의 담당자를 문책할까요?

보통 을에 해당하는 회사는 늘 일은 많은데 인력이 부족하고, 시간도 부족합니다. 이런 와중에 위와 같은 갑을 만났다면 좋은 먹잇감일 뿐입니다. 게다가 회사 내부적으로는 을의 담당자가 그러고 있는 걸 알아도 굳이 건들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회사 전체적으로는 그 담당자가 일을 잘하고 있는 거라고 말할 겁니다. 회사가 보통 그렇습니다. 고객이 원하는 걸 모두 잘해주는 게 일을 잘하는 게 아니고, 고객사를 상대로는 최소한으로 일을 해주거나 해줘야 하는 것보다 덜 해 줬는데도 아무 문제가 나지 않고 잘 넘어가는 게 일을 잘하는 겁니다. 무조건 Yes라고 하는 건 잘못된 거고, 무조건 No라고 해도 일이 어떻게든 잘 마무리되면 일을 잘한 겁니다.


갑질


결국 을이 그렇게 하지 않도록 하는 건 갑입니다. 그런데 앞에 말했던 것처럼 오히려 을 때문에 갑의 직원들이 고생을 하고 있다면 을의 담당자가 나쁜 게 아니고, 갑의 담당자가 일을 못한 겁니다. 을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갑의 담당자로서 일을 하지 않은 겁니다. 갑이지만 을을 설득하지 못하니 문제에 대해서 쉬쉬하거나 불편함을 직접 감수하고 있는 겁니다. 거꾸로 을은 그렇게 상황이 되게 해서 자신은 일을 덜 하고, 회사에서도 능력자로 인정받게 됩니다.


결국 갑질이라는 건 갑의 담당자로서 자신이 편하고, 일을 잘하기 위해 을한테 하는 행위인데 그 정도가 심해지면 말 그대로 "갑질"이 되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 이게 갑질이라서 문제가 됐다면 위에서 말한 을의 담당자는 "을질"이라는 표현으로 비난받아야 됩니다. 하지만 그런 표현은 없죠.


갑이 일을 잘하는 것과 갑질은 한 끗 차이입니다. 어쩌면 행운의 문제일 수도 있는 거고요. 사회의 분위기나 여론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갑의 담당자로서 열심히 일을 했을 뿐이데 갑질을 했다고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겁니다. 결국 적당히 해야죠. 갑으로서 을한테 요구하고 주장할 수 있는 건 당연히 해야 되고, 그걸 하지 않으면 오히려 일을 못한 겁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심해서 말도 안 되는 것까지 갑이라는 이유로 을한테 요구한다면 그게 진짜 갑질이 되는 겁니다.


갑으로서 갑질을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쉬쉬하고 방치하면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조직을 힘들게 하고, 비효율적이게 하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오히려 더 큰 문제입니다. 회사 입장에서는 후자가 더 최악일 겁니다. 돈만 사용하고, 얻은 게 없는 거니까요. 악독하고, 잘못되었더라도 자신이 속한 조직에 이로운 결과로 이어지면 그건 같은 조직 내에서는 용납이 되지만 옳은 결정/행동이더라도 상대 조직만 좋고, 자신의 조직에 해가 되면 그건 절대로 용납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인정받고, 승진을 하겠지만 후자는 비난받고, 낙오될 겁니다. 그게 회사라는 조직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직장인처럼 일하는 개인 사업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