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로 날 가두지 말자
대리
누가 뭐래도 저의 본업은 소프트웨어 회사의 개발자입니다. 출근 시각은 9시로 고정되어 있지만 퇴근 시간은 매일 다른 월급쟁이 직장인입니다. 회사 자체가 직급에 상관없이 존칭을 사용하기 때문에 대리님이 이라고 절 불러주지요.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 될 지금의 회사를 5년 정도 다니고 있고, 지금은 그나마 사람들과도 친해지고 뭔가 과하거나 덜하지 않은 평범한 수준의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과장이라 불릴 거고 또 차장, 부장이라고 불릴 날이 올 테지만 그때까지 직장 생활을 할 생각은 없는 상태입니다. 아마 과장이 저의 마지노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회사 생활에서는 직급이 저의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고, 중소기업인지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직급도 올라가는 그런 회사인지라 저의 직급도 차츰 변해 가겠지요. 그러다 보니 이 직급은 저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직급으로서 크게 애착이 가지 않고, 뭔가 새롭다는 느낌도 없는 게 사실입니다.(지금 제가 너무 감상적인가요?ㅎㅎ)
회사에서 불리는 이런 직급은 아니지만 회사를 떠나서의 직급을 몇 가지 써보겠습니다.
쌤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직급입니다. 회사 입사하기 전까지 제가 2년 넘게 과외를 해주던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은 벌써 대학생인데 저와 같은 대학교를 갔습니다~ 종종 만나는데 지금도 저를 쌤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그렇게 부르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그 녀석도 언제부터 그렇게 저를 불렀는지 알지 못하겠죠~ 분명 처음에는 저를 선생님이라고 불렀었는데 어느 순간 쌤이라고 부르고 있고, 저도 그게 더 자연스럽습니다. 쌤이라는 저의 직급은 어디에서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저만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의 의도에 의해 생겨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제가 뭔가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선생님이 맞겠지만 절 좋고, 편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쌤이라고 부르는 거겠죠. 이제는 제가 가르쳐 주었던 내용들도 그 아이는 다 알고 있고, 그 아이는 또 다른 아이에게 그 내용을 가르쳐 주면서 선생님 혹은 쌤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정말 애정이 가는 저의 직급입니다. 아 그리고 저와 같은 대학교를 입학한 뒤로는 종종 선배님이라고도 부른답니다.
선생님
근래에 생긴 직급입니다. 제 연습실에서 드럼을 배우고 싶다는 레슨생이 아는 분을 통해 연락이 왔습니다. 의대생인데 어떤 사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저와 나이 차가 크게 나지 않았습니다. 제 나이는 말하지 않아서 아마 제가 더 나이가 많을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제가 노안인지라...) 단기간 레슨이라 서로 존징을 하면서 레슨에만 신경 썼는데 하다 보니 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더라고요. 맞긴 하지요. 뭔가를 가르쳐 주고 있고, 내 나이가 본인보다 훨씬 많아도 생각했을 테니깐요ㅎㅎ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뭔가 불편한 호칭이었지만 그래도 본업이 개발자인 제가 지금은 선생님일 수 있다는(그것도 예비 의사한테) 점에서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예전에 절 쌤이라고 부르던 아이(위에서 이야기한 아이입니다)를 과외할 때도 그 아이의 어머니께서도 저를 선생님이라고 불러주셨었습니다. 그분은 저보다 나이도 더 많았는데 말입니다. 뭔가를 가르칠 수 있다는 거의 장점은 참 많은데 부가적으로 저의 직급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주인장
음악 연습실 때문에 생긴 직급입니다. 음악실을 함께 사용하는 분들 중에는 저의 아버지 뻘 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이 저를 부르실 때 그래도 막 부를 수는 없으니 주인장이라고 불러 주십니다. 어찌 되었든 제 연습실이고 일종의 세를 내고 그 공간을 빌려 사용하시는 거니깐요. 의도하지 연습실이라는 걸 제가 마련하지 않았더라면 만날 수도 없는 인연의 사람들이었고, 주인장이라는 호칭도 저한테는 없었을 겁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누군가 저를 부를 때 다른 직급일 수 있다는 건 참 흥분되는 사실입니다. 그에 따르는 물질적, 정신적 장점도 있고, 단점도 존재하므로 저의 일상에서 상당한 자극을 주는 요소들입니다.
건물주
친구들이나 회사 분들이 술 한잔씩 마시고 난 뒤에 저를 부르는 직급입니다. (투자용 오피스텔 구매기) 제 명의로 된 오피스텔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건물주라고 불러 주십니다. 이 오피스텔이 있기 때문에 부모님에서 함께 살고 있어도 조금은 떳떳(?)할 수 있답니다 ㅎㅎ 제 명의로 될 다음 건물을 또 다른 음악 연습실로 할지, 제가 살 집으로 할지 아니면 또 다른 오피스텔로 할지 고민 중입니다.
부사장
참 부끄러울 수도, 그냥 웃고 넘어갈 수도 있는 호칭입니다. 이 호칭은 회사 술자리에서 모든 분들이 대놓고 저를 씹을 때 사용하는 호칭입니다. 이유는 제가 다니는 중소기업 사장님의 조카이기 때문입니다 ㅋㅋ 그래도 이런 소재로 같은 회사 사람들과 웃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호칭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언젠가는 정말 제 일을 하면서 이런 호칭으로 불리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