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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Nov 04. 2021

책을 구하기 위한 노동

버킷리스트

나 : 네가 독립을 한다면 몇 살에 할 것 같아? 그냥 상상해보는 거야. 
중2 : 글쎄요... 스물세 살이나 네 살쯤 아닐까요?
나 : 네가 꿈꾸는 너의 집은 어떤 모습이니?
중2 : 침대가 있고요, 침대 앞에 텔레비전이 있으면 돼요. 
나 : 그리고?
중2: 침대에 올릴 탁자요. 그거면 돼요.
나 : 너 정말 소박하구나. 
중2 : (수줍게) 텔레비전만 있으면 돼요.
나 : 네가 어른이 될 때쯤이면 텔레비전이라는 가전제품은 사라질 수도 있대. 
중2 : 안 돼요!!!!!
나 : 홀로그램 화면이 텔레비전 화면을 대체할 수도 있다던데?(요즘 읽은 책으로 아는 척하는 중)


나에게도 꿈꾸는 집이 있었다. 결혼 전부터 내가 꿈꾸는 집의 버킷리스트는 딱 하나였다. 한쪽 벽면이 책장으로 가득한 집을 만들고 싶다는 기대. 그것만으로 충분하고, 바라만 봐도 너무 행복할 것 같았다. 

베트남에 살면서 늘 언젠가는 떠난다는 생각으로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다 보니 잊혀진 버킷리스트이기도 했다. 그 꿈이 오늘에서야 비슷하게나마 이루어졌다. 우리 집은 작은 구조상 어쩔 수 없이 책장이 거실과 안방, 남편이 작업하는 방에 하나씩 흩어져 있었다. 주로 생활하는 공간인 거실 책장에는 열 살 어린이를 위한 책들로 채웠고, 남편의 작업방에 있는 책장에는 남편의 책 몇 권과 아이의 지난 학교 책과 노트들, 만화책이 꽂혀 있다. 초반에는 책 읽는 모습도 종종 보여주더니 이제는 노안이 와서 책을 못 보겠다고 해서 남편 책은 거의 없다. 안방에는 내가 읽는 책들과 필요한 책들이 있다.


며칠을 고민하고 벼르다가 남편에게 얘기했다.

“아무래도 거실 책장 위치를 바꿔야겠어.”

“아니, 왜? 잘 있는 책장을?”


해가 들어오는 방향이 바뀌면서 오후만 되면 거실 책장 깊숙하게 강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게 신경 쓰였다. 책 기둥이 모두 햇빛에 활활 바래질 위기였다. 신경 써서 오후가 되면 거실 암막 커튼까지 치지만, 외출을  하거나, 다른 일을 하다 보면 놓치기 일쑤였다.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필요했다.


'책장 옮기기 프로젝트'

작은 집에 큰 책장이 갈만한 곳은 많지 않았다. 3년 동안 이미 최적화된 위치를 어떻게 바꿀지 답이 없었다. 거실이 작아서 책장이 옮겨갈 수 있는 위치마다 스위치가 있었다. 집 계약 기간이 두 달 남은 상황에서 굳이 그 큰 수고를 해야 하냐는 남편과 나의 책은 소중하기에 지켜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책장을 그대로 두고 본인이 부지런히 커튼을 치겠다는 남편을 설득해서 이리저리 옮겨봤지만 마땅한 곳은 없었다. 눈이 불편하거나, 공간이 답답하거나, 스위치 때문에 어정쩡했다.


그러다 생각한 장소는 안방.

안방에 있던 책상 위치를 옮기고, 그 자리에 거실에 있던 책장을 넣으니 제 자리를 찾은 듯했다. 덕분에 거실은 넓어졌고, 안방 한쪽 벽면은 4개의 크고 작은 책장으로 채워진 작은 도서관이 되었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졌다. 20대에 꿈꾼 고풍스럽고 웅장한 느낌의 한 면 가득한 책장이라는 버킷리스트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흐뭇하다. 

책 꽂는 위치를 다시 정리하고, 닦았다. 바닥에 늘어져 있는 책 중에서 아이는 못 보던 책을 찾았다면서 책을 읽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고 했다. 햇빛으로부터 책을 구하려다가 소박한 평생의 버킷리스트도 이루고, 어린이의 독서 흥미도 끌어올렸다.


“이제부터 안방은 우리 집 도서관이야.”


아이 방에 예쁜 싱글 침대를 들이면서, 아이는 그날로 독립했다. 이제야 여자 아이 방다운 방이 완성됐다. 그리고 안방은 아늑한 미니 도서관이 되었고, 거실은 쾌적하게 넓어졌다. 이 집에 산지 3년 차. 이사를 두 달 앞둔 지금에야 집이 안정이 됐다. 

몇 날 며칠을 거실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보며 고민을 했다. 그래도 스트레스를 받느니 하루라도 마음 편하게 살기로 했다. 할 일은 많았고, 노동으로 마무리한 하루였지만, 오늘은 만족스러운 날이다. 











내일도 이 벽면에 붙어서 정리를 하고 있을 듯 하다. 비우고 채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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