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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Nov 25. 2021

잘 쓰는 건 아니고 그냥 쓰는 중

언어 습관이 뭐길래

“잘 쓰고 있니?"

"아니요?"

"안 쓰고 있다고?"

"아뇨. 쓰고는 있는데, 잘 쓰는 건 아니고 그냥 쓰고 있어요."


아… 오해다. ‘잘’ 쓰라는 압박은 아니었다.

형편없는 이곳의 인터넷  사정으로 온라인 수업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답답한 마음에 계속 물었을 뿐이다.

‘글을 쓰는 행동을 하고 있니?’라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 질문을 듣는 학생들 입장에서는 전혀 다르게 들렸나 보다.


‘(멋지고 완벽하게 괜찮은) 글을 잘 쓰고 있니?’

“아니요. 엉망진창으로 쓰고 있어요.”


몰랐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던 말이 아이들에게 부담이 될 줄이야. 물론 나의 역할이 아이들의 글 쓰는 능력을 향상시켜주는 것이지만, 정말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잘’이라는 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초등 국어사전에는 ‘잘’의 뜻이 ‘좋고 알맞게’, ‘쉽게’, ‘무사히’라고 나와 있다.

잘 다녀와. 잘 자. 잘 가. 잘 살아. 잘해.
잘 다녀왔니? 잘 놀았니?
잘 먹었니? 잘했니? 잘 잤니?
잘 찢어진다. 잘 넘어진다.

알맞게 글을 쓰고 있는지는 궁금하지만 묻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다. 쉽게 글을 쓰고 있냐는 것도 아니었다. 글 쓰는 과정이 어려운 일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무사히 쓰고 있는 게 궁금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내 실수다.


그냥 나도 그렇게 익숙하게 들어온 말이라서 별다른 의미 없이 쓰는 말이었다.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으니 이제부터는 조심해서 사용해야겠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는 연습을 해야겠다.


“잘 썼네” 대신에 “생각이 잘 드러나 있네.”, “이만큼 쓰기까지 손 아팠을 텐데 수고했어.” 이렇게 말해 볼까?

“잘 먹어” 대신에 “맛있게 먹어.” “많이 먹어.”라고 말해줄까?


“잘 쓰고 있니?”는 뭐라고 해야 할까? “열심히 쓰고 있니?”, “생각한 걸 꺼내고 있니?”

아니다. 말하는 이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게 “하고 있니?”, “쓰고 있니?”라는 게 더 낫겠다.


하지만 내 언어 습관이 변화보다 인터넷 품질이 더 빨리 나아지기를, 코로나 시국이 하루속히 끝났으면 좋겠다.


일단 봐. 엉망진창인지 어떤지는  쓰고 얘기해보자.”

힘든 글쓰기에 최선을 아이들을 응원한다. 잘하고 있어!!!

이런. 또 ‘잘’이라고 써버렸다.

그래도 말이다. 노는 건 잘 놀자. 재미있게. 어린이의 특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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