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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Apr 26. 2022

자신만만 vs 만만

한국어를 가르칩니다.

해외에서 국제학교에 다니는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아이들의 국어실력만큼이나 내 영어 실력도 덩달아 성장한다.

-저 지난주 friday에 친구랑 놀았어요. 

-아... 금요일에 놀았구나.


사소한 말들이지만, 나와 함께 수업하는 동안만큼은 한국어를 사용하자고 아이들과 약속했다. 그래도 말하다 보면 툭툭 튀어나오는 영어를 내가 한국어로 다시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듣게 하거나, 그 단어를 한국어로 뭐라고 하는지 되물어보며 한국어에 익숙해지길 기대한다.

미국도 아닌 베트남에 사는 한국 아이들은 대부분 한국적인 문화 속에서 어울려 살아가기 때문에 한국어를 잘 하지만, 외국에서만 오랫동안 살거나, 국제학교에 오래 다니면서 영어 사용이 더 많은 아이들에게 한국어는 여느 해외와 마찬가지로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어 잘한다고 생각했던 우리 집 어린이도 언제부터인가 말을 할 때 영어 단어를 섞어 쓰기도 하고, 한국어 단어를 물어보는 빈도수가 많아졌다. 


오늘 만난 학생은 그중에서도 영어를 가장 많이 섞어 쓰는 아이였다.

"우리 오늘 게임하면서 공부할까?"

"뭔데요?"


<훈민정음 게임>. 수업 시간 내내 누가 더 영어를 많이 쓰는지 내기를 하기로 했다. 더 많이 쓴 사람이 다음 수업 시간에 간식 준비하기. 이 게임을 하면 누군가는 영어를 말하지 않기 위해서 입을 다물기도 하고, 게임에 집중하느라 수업의 본질을 흐리기도 하기 때문에 자주 하지는 않지만, 가끔은 자신이 얼마나 많이 언어를 혼용해서 쓰고 있는지를 느끼기에 좋은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게임의 결과는 10:10. 나와 학생 모두 열 번씩 영어를 썼다. 사실 학생들과 이 게임을 하면서 한 번도 학생들을 이겨본 적이 없다. 일부러 져주지 않는데도 말이다. 학생들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설명을 할 때 영어를 많이 섞어서 쓰다 보니 평소 잘 쓰지 않는 영어가 툭툭 튀어나오는 게 문제다. 


"음... 이 상황은 말이야. 예를 들어서 네가 맥도널드에 가서 햄버거를 먹으려는데..."

-선생님! 영어 썼어요.


"자, 다음 page 넘겨볼까?" 

"이 이야기의 point는 뭐라고 생각하니?"

"이건 verb이기 때문에..."


어려운 영어를 쓰는 것도 아닌데 오늘도 학생과 막상막하의 영어 빈도수를 자랑했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학생에게 게임 룰을 얘기해주었다.

"오~ 저 만만해요!"

"어? 아~~~"


학생이 하고 싶었던 말은 '자신만만'이었다. 그런데 그걸 '만만'이라고 말하니 전혀 다른 의미가 되었다. 앞에서 '자신'이라는 두 글자를 빼면 얼마나 의미가 달라지는 지를 알고 나니 학생도 깜짝 놀랐다. 참 재미있는 한국어다. 

"저 진~~~짜 몰랐어요."

"네가 이 단어를 많이 안 쓸 수는 있어. 하지만, 한국 친구들이나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말을 들었을 때는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영어권에서 살면서도 네가 한국어를 바르게 알아야 할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해."


몇 년째 수업을 함께 하고 있는 이 학생의 가장 큰 장점은 꾸준함이다. 처음으로 일기 숙제를 내주고 확인하던 날, 솔직히 뭐라고 썼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동안 거의 쓴 적 없던 한글로 글을 쓴 아이에게 이해가 안 된다며 기를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아주 천천히 성장했다. 지금은 정말 많이 성장해서 웬만한 맞춤법은 틀리지도 않는다. 매 시간 일기를 쓰느라 힘들었지만, 자기 스스로도 안다. 자기가 지금 얼마나 잘 해내고 있는지. 


아이들이 쓴 글은 체크하기 전에 꼭 아이가 먼저 소리 내서 읽게 한다. 읽다 보면 아이 스스로 어디가 틀렸는지 찾아낸다. 어떤 게 맞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쓴 게 틀린 거라는 건 알겠단다. 그 정도의 눈이 생긴 것만으로도 훌륭한 일이라며 매 수업시간마다 박수를 쳐 준다. 

그럼에도 오늘도 아쉽게 틀린 어휘가 있다. '핼머니'. 참 엉뚱하면서도 이해가 된다. 


"이게 좀 어색하지 않니?"

"왜요? 핼머니가 왜요? 전 이렇게 말하는데요..."

"할머니라고 써야 되고, 그렇게 말해야 돼."


'질겁다'가 '즐겁다'로 바뀌었으니, 이번 방학에 한국에 가서 '핼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할머니'라고 부르게 될 그날을 위해 열심히 말하고 써보자. 할. 머. 니.

한국에 가서 멋지게 써먹을 속담 하나와 사자성어도 배워보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하나씩만. 


그리고 우리는 만만하지 말고, 자신만만한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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