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말, 5월 초는 베트남의 몇 안 되는 황금연휴다. 29일은 흥븡 왕 추모일이고, 30일은 남부해방기념일이다. 게다가 5월 1일은 노동절. 대체 공휴일로 3일까지 쉬니 가뭄에 콩 나듯 있는 이 귀한 연휴가 반가울 뿐이다. 연휴에 맞춰 학교도 열흘간의 봄방학을 시작해서 어린이와 일주일 동안 한국에 다녀왔다.
"언니, 우리 동네까지 버스 타고 올 거예요, 지하철 타고 올 거예요?"
이젠 무조건 지하철이다. 버스 노선은 타고 다니던 것도 다 잊어버려서 버스정류장에서 헤매게 되니 포기한 지 오래다. "그냥 이제쯤이면 나를 교포로 생각해 줄래?" "한국말 잘하는 외국인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해외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한국에서 실수할 뻔한 했던 여러 일이 있다.
인천공항에서 주차장으로 가던 중 신호등이 빨간색이었다. 신호등 기둥에 누르는 버튼이 있길래 길을 건너려고 눌렀더니 동생이 말렸다. "누나, 그거 시각 장애인들 위한 거야."
호치민 1군 Nguyen Hue 광장에서는 길을 건널 때 보행자 버튼을 누르면 잠시 후에 신호등이 바뀌는 시스템이어서, 다른 용도로 쓰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실수다. 그날 인천공항에서 우리는 시각 안내 메시지를 걸으며 길을 걸었다. 그 후로 나는 신호등을 기다리다가 버튼을 누르려는 어린이의 손을 황급히 붙잡기도 했다. 나라마다 시스템이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년 만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내 습관과 행동이 베트남에 맞춰져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됐다.
[신호등 버튼]
한국 :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보행 안내 버튼
베트남 : 도로를 건널 때 보행자들이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신호등을 파란불로 바꿔주는 보행 버튼
무심코 길을 건널 때 차가 없다고 무단횡단도 여러 번 할 뻔했다. 아직까지 신호등이 많지 않고, 보행자를 위한 횡단보도라고는 해도 늘 차가 우선인 베트남에서 일단 양쪽을 보고 차가 없으면 얼른 건너 다니던 습관 때문이다. 그 후로는 한국에서 길을 건널 때면 멈칫하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한국은 카드 결제할 때 카드를 직원에게 건네주는 게 아니라 직접 꽂아서 결제하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한국을 떠나올 때까지 가장 고쳐지지 않은 습관이 이 결제 시스템이었다. 카드를 건네면 "앞쪽에 꽂아주세요." 그래서 꽂으면 "카드를 안쪽으로 더 밀어주세요." 한국에서 자꾸만 손이 부끄러워진다.
[식당에서 카드 결제]
한국 : 테이블에 있는 영수증을 들고 카운터로 가서 결제한다. 결제는 대부분 손님이 직접 카드를 꽂는다.
베트남 : 식사를 끝내면 직원을 부른다. 직원이 영수증을 가져오면 금액을 확인하고, 카드를 건네면 직원이 가져가서 결제한 후에 가져온다. 현금 결제 시에도 마찬가지. 직원이 거스름돈을 가져다준다.(최근 이 방법으로 카드 도용이 많아져서 대부분은 카운터로 가서 카드를 건넨다.)
쇼핑 천국 한국에서 어느 매장에서든 많이 듣는 말은 "포인트카드 있으세요?"다. 때로는 회원 가입하면 할인해 준다고 해서 가입하고, 또 큰 쇼핑몰 같은 경우는 왠지 손해 보는 것 같아서 회원가입을 하고 포인트를 적립한다. 물론 지금까지 포인트를 써 본 적은 없다. 일 년에 한두 번 적립해서 쓸 수 있는 포인트도 아닐 테고 말이다. 그래도 포인트 적립하겠냐고 물으면 "네"라고 대답한다. 나도 보통의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마트에서 계산할 때 포인트 적립을 위해 패드에 전화번호를 입력하는데 계산을 하던 직원이 답답한지 "앱으로 보여주시면 빨라요"라고 했다. 그걸 몰라서 그런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을. 포인트 적립을 깜빡해서 늦어지기도 하고, 1년에 보름 정도 쓰는 한국 전화번호가 빠르게 눌러지지 않기도 한다. 게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앱을 찾아 누르는 시간보다 전화번호를 누르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누구는 빨리 안 켜고 싶은가요.' 겉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속으로 꿍얼거렸다. 그래도 꿋꿋하게 쓰지도 못할 포인트를 적립한다.
언젠가는 쓰겠지.
한국은 시스템이 너무 빨리 바뀌고 있다. 1년에 한 번씩 한국에 가는 나로서는 그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다. 그래서 주변에서 종종 나를 부끄러워한다. 내가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면 동생이 조용히 내 카드를 가져가서는 카드리더기에 넣고, 맥도날드에서 먹고 그냥 일어나려는 나에게 친구는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친정집에서도 쓰레기를 버릴 때면 어디에 버려야 하나 머뭇거리게 된다.
5학년이 된 어린이에게도 이제는 한국과 베트남의 다른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린이는 지하철에서의 사람들 모습이 가장 신기하다고 했다. 모두가 서서 핸드폰만 보고 있는데, 지하철이 정차할 때 열차가 흔들려도 어느 누구 하나 흔들리거나 비틀거리지 않는다고 했다. 지하철이 멈출 때마다 온몸이 휘청거려서 나를 꼭 붙들고 있어야하는 어린이로서는 지하철 안에 탄 사람들은 모두 대단한 능력자로 보인 것이다. 나 역시 오랜 시간과의 사투로 쌓은 본능과도 같은 지하철 균형 감각이 지하철 탈 때면 살아난다. 사람들을 관찰하던 어린이는 어느 날부터인가 내릴 때가 되면 일부러 열차가 정차하기 전에 슬며시 일어났다. "엄마! 나 안 흔들렸어!!!!" 이제 슬슬 너도 지하철 내공이 생기는구나.
아직은 키가 작아서 사람이 붐비는 시간에 타면 이리저리 떠밀리기도 하고, 머리에 가방을 맞는 일도 간간이 있지만, 어린이는 지하철 타는 게 좋단다. 사람들 관찰하는 게 좋단다.
"사람들은 엄청 신기해. 막 자다가도, 핸드폰만 보다가도 자기가 내릴 때가 되면 벌떡 일어나서 가더라."
"사람들은 주변을 확인하지 않아도 자기가 어느 길로 가야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아."
여전히 나에게도 당연한 일상같은 모습들이 어린이의 눈에는 신기하고 놀랍게만 보인다.
지하철에서 아이는 새로운 세상을 본다.
하긴, 요즘은 나에게도 한국은 새로운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