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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Aug 30. 2023

영어보다 더 빨리 느는 건 눈치다

통역은 아닙니다. 

"오늘 회의를 도와주실 통역이신가요?"


통역이라는 말을 듣기엔 영어도, 베트남어도 실력이 너무 부족해서 들을 때마다 너무 부끄럽다. 

일반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호칭은 여전히 '작가'다. 누구 씨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하고, 정직원도 아니니 서로 부르고 대답하기에 편한 호칭이다. 회사 내 홍보팀 디렉터로 일하면서 다른 부서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적지만, 만나는 두세 한국 직원분들은 나를 작가님이라고 부르고, 베트남 직원들 사이에서는 '엘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나마도 잘못 전달돼서 '엘리스'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부르면 나를 부르겠거니 생각하고 대답한다.


한국에서는 내 이름에 대해 조금도 불편한 적이 없었지만, 베트남에 살면서는 여러 번 영어로도 부르기 쉬운 성이나 이름을 가졌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름 석자를 한 글자씨 쪼개도 어느 하나 영어로 쉽게 부를만한 글자가 없으니 영어 이름을 만들 수밖에. 게다가 내 성 '허(Heo)'는 베트남어로 돼지라는 뜻이니 이 세상에서 내 이름 석자로 살기가 참 힘들다.  


내가 하는 일은 홍보실 디렉터로서 홍보와 관련된 다양한 업무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한국적인 생각과 활동을 베트남 문화와 정서에 잘 녹여 절충시키고,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어 진행하는 것이다. 나의 생각을 관철시키고, 팀원들의 생각과 계획을 듣기 위해 영어가 느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눈치가 늘고 있다. 나름 생존하기 위한 전략이다. 일단 자료를 받으면 구글 번역이나 구글의 인공지능 바드로 한국어로 번역해서 공부한다. 그리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리더들에게 물어보고 정리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프레젠테이션 자료도 준비하고, 보도자료도 쓰고, 한국과 소통할 자료도 정리하다 보니 경험과 노하우가 쌓였다. 팀 내에 한국인이 혼자여서 영어와 베트남어를 잘하든 못하든 한국어로 된 자료를 베트남어로 번역해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도 내 몫이고, 베트남어로 된 자료를 한국어로 매끄럽게 작업하는 것 또한 내 일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통역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처음으로 한국과의 화상 회의에 참여할 기회도 생겼다. 마케팅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싶어 전날부터 잠을 설쳤다. 자기 전에도 자료를 읽고, 아침에도 읽고, 화상회의를 앞두고는 컴퓨터 화면에 모든 자료를 띄워두었다. 회의는 잘 아는 내용도 있었고, 처음 듣는 내용들도 있었지만 무리 없이 진행됐다. 영어를 잘해서 회의를 잘 주도했다기보다는 지난 7개월 동안 맞춰온 호흡 덕분에 베트남 직원들이 어떤 내용을 전달하고 싶은지 빠르게 알아차리는 눈치 덕분이었다. 그리고 살면서 알게 된 베트남과 한국의 문화 차이를 곁들어 한국 팀에 전달하다 보니 회의는 어려움 없이 잘 마무리되었다. 통역이라는 말은 감히 근처에도 갈 수 없는 표현이고, 브릿지 정도의 역할이었다.

Thank you Cô for this morning, I can not imagine I can do these things without you.
(Cô - 선생님 앞에 붙이는 호칭)

We really appreciate having you on our team, I learned a lot from you.


오후에 팀 리더에게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 이럴 때 부끄러운 나의 대답은 이것뿐이다. "더 열심히 할게. 우린 한 팀이잖아."


"작가님은 저보다 더 애사심이 높은 것 같아요."

"그런가요? 저처럼 오래 쉬어 보세요. 뭐든 열심히 즐겁게 하게 된다니까요. 고맙잖아요."


진심이다. 


물론 이 상황이 싫은 한 사람도 있다. 바로 방학을 맞은 어린이. "엄마 언제 와?" 

너도 일하는 엄마는 처음이지? 우리 같이 잘 성장해 보자. 

시간을 쪼개서 아이와도 시간을 보낸다. 모든 워킹맘들에게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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