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노마드족
늘, 언제나 그랬다. 습관처럼.
일의 특성상 프로그램을 하다 보면 그만두게 되기도 하고, 옮기는 일도 생긴다. 그때마다 그동안 일하면서 쌓아둔 나의 흔적을 정리하는 게 몸도 마음도 힘들었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자료들은 왜 그리도 많이 모아두었는지, 회의실에 개인 물건은 왜 그리도 많이 두었는지. 몇 번 그런 일을 경험하고는 어디에서 일하든 개인 물건은 최소화로 두겠다고 다짐했다. 작은 거울, 핸드크림처럼 언제든 떠날 때면 간단하게 가방에 쓸어 담으면 될 정도의 물건만 두었다.
14년만에 다시 일을 시작하고 몇 달이 지났다. 지금도 회사 자리에는 내 물건이 아무것도 없다. 처음에는 회의실에서 일했기 때문에 물건을 둔다는 생각을 안 했고, 부서에 자리를 잡고 일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책상에는 내 자리를 표시한 이름표 외에는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다. 노트북만 있으면 일하는데 문제가 없으니 따로 필요한 것도 없다.
그래도 가끔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가끔 잊어버리고 안 가져오는 것들이 있다. 예비용 마우스를 하나 가져다 두고 싶기도 하고, 가방이 바뀔 때 종종 빼먹는 핸드크림 정도는 회사 책상에 두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더운 나라에서 손은 왜 그리 건조한지 핸드크림은 필수다. 하지만 작은 상자 하나에 들어갈 만큼만 챙겨두면 괜찮을 것도 같다는 마음은 꾹 누르고 아무것도 두지 않기로 했다.
노트북이 들어가는 커다란 가방에 다이어리도 넣고, 마우스, 노트북 충전기, 커피가 담긴 텀블러까지 담는다. 핸드크림과 비상용 커피, 영양제가 들어있는 파우치까지 챙기면 가방은 빈틈없이 꽉 채워진다. 가방을 바꾸는 것도 큰 일이니 같은 가방을 출근용으로 쓴다.
회사에 내 물건이 없으니 마음을 적당히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회사에 너무 올인하지 않는 마음, 큰 기대하지 않는 마음, 다음 계약에 연연하지 않는 마음. 일에 최선을 다하되 미련은 갖지 않는다. 프리랜서이니 너무나도 당연한 마음일 수도 있겠지만, 사람의 욕심과 기대라는 게 그렇지 않으니 적당한 거리를 늘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일할 때 필요한 물건들은 우리 집 거실 작업실에 둔다. 짐 챙겨 떠날 일 없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나만의 작업실이지만 이 공간에도 웬만하면 아무것도 두지 않으려고 한다. 내 주변 환경을 보면 가볍게 살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이 보인다. 늘 걱정을 짊어지고 사는 사람이다 보니 주변 환경만이라도 가볍게 두고 계속해서 가볍게 살기를 연습하는 것이다.
어쩌면 정착하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더 강박적으로 비우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민 제도도 없는 베트남에서 외국인으로 14년을 살다 보니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마음이 내 안에 있다. 그래서 살림도 단출한 편이다. 비싼 건 사지 않고, 언제라도 떠나게 된다면 커다란 캐리어 하나에 넣을 수 있을 만큼의 물건에만 마음을 주고 있다. 몇 개의 컵, 두 개의 책장에 가득 채워진 책들.
오늘을 잘 살면 내일도 그렇게 따라올 거라고 기대하며 오늘을 가볍게 살아간다. 단지, 가방만 무거울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