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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Aug 31. 2023

떠날 때는 말없이, 흔적도 없이

디지털 노마드족

늘, 언제나 그랬다. 습관처럼.


일의 특성상 프로그램을 하다 보면 그만두게 되기도 하고, 옮기는 일도 생긴다. 그때마다 그동안 일하면서 쌓아둔 나의 흔적을 정리하는 게 몸도 마음도 힘들었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자료들은 왜 그리도 많이 모아두었는지, 회의실에 개인 물건은 왜 그리도 많이 두었는지. 몇 번 그런 일을 경험하고는 어디에서 일하든 개인 물건은 최소화로 두겠다고 다짐했다. 작은 거울, 핸드크림처럼 언제든 떠날 때면 간단하게 가방에 쓸어 담으면 될 정도의 물건만 두었다.


14년만에 다시 일을 시작하고 몇 달이 지났다. 지금도 회사 자리에는 내 물건이 아무것도 없다. 처음에는 회의실에서 일했기 때문에 물건을 둔다는 생각을 안 했고, 부서에 자리를 잡고 일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책상에는 내 자리를 표시한 이름표 외에는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다. 노트북만 있으면 일하는데 문제가 없으니 따로 필요한 것도 없다.

그래도 가끔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가끔 잊어버리고 안 가져오는 것들이 있다. 예비용 마우스를 하나 가져다 두고 싶기도 하고, 가방이 바뀔 때 종종 빼먹는 핸드크림 정도는 회사 책상에 두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더운 나라에서 손은 왜 그리 건조한지 핸드크림은 필수다. 하지만 작은 상자 하나에 들어갈 만큼만 챙겨두면 괜찮을 것도 같다는 마음은 꾹 누르고 아무것도 두지 않기로 했다.


노트북이 들어가는 커다란 가방에 다이어리도 넣고, 마우스, 노트북 충전기, 커피가 담긴 텀블러까지 담는다. 핸드크림과 비상용 커피, 영양제가 들어있는 파우치까지 챙기면 가방은 빈틈없이 꽉 채워진다. 가방을 바꾸는 것도 큰 일이니 같은 가방을 출근용으로 쓴다.


회사에 내 물건이 없으니 마음을 적당히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회사에 너무 올인하지 않는 마음, 큰 기대하지 않는 마음, 다음 계약에 연연하지 않는 마음. 일에 최선을 다하되 미련은 갖지 않는다. 프리랜서이니 너무나도 당연한 마음일 수도 있겠지만, 사람의 욕심과 기대라는 게 그렇지 않으니 적당한 거리를 늘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일할 때 필요한 물건들은 우리 집 거실 작업실에 둔다. 짐 챙겨 떠날 일 없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나만의 작업실이지만 이 공간에도 웬만하면 아무것도 두지 않으려고 한다. 내 주변 환경을 보면 가볍게 살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이 보인다. 늘 걱정을 짊어지고 사는 사람이다 보니 주변 환경만이라도 가볍게 두고 계속해서 가볍게 살기를 연습하는 것이다.


어쩌면 정착하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더 강박적으로 비우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민 제도도 없는 베트남에서 외국인으로 14년을 살다 보니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마음이 내 안에 있다. 그래서 살림도 단출한 편이다. 비싼 건 사지 않고, 언제라도 떠나게 된다면 커다란 캐리어 하나에 넣을 수 있을 만큼의 물건에만 마음을 주고 있다. 몇 개의 컵, 두 개의 책장에 가득 채워진 책들.


오늘을 잘 살면 내일도 그렇게 따라올 거라고 기대하며 오늘을 가볍게 살아간다. 단지, 가방만 무거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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