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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Nov 19. 2019

나는 매일 거실로 출근한다

본업과 부업 사이

사람이 굶어 죽지 않으려면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데, 더더군다나 외국에서 살려면 그 '기술'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뼛속 깊이 느낀다.

호치민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지인은 가방에 그림을 그리는 '마카주 기법' 클래스를 오픈하고는 매일 수업이 풀타임으로 차서 바쁘고, 예쁜 그릇을 좋아해서 집에 놀러 가면 차를 마시고 디저트를 내올 때마다 찻잔과 접시를 바꿔서 내놓던 동생은 본격적으로 그릇을 모으기 시작하더니 SNS에서 그릇을 팔기 시작했다. 또, 동생이라고 부르기에도 까마득히 어린 싱글녀 동생은 대기업에서 주재원으로 파견 나왔다가, 본사로 복귀할 시점이 되었을 때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호치민에 남아 평소에 좋아하던 빵을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베이킹 클래스를 오픈하고, 커피숍에 빵을 납품하다가 지금은 자신만의 커피숍을 오픈하기 위해 열심히 가게 자리를 알아보러 다니고 있다. 나는 그들이 진정으로 부럽다. 기술도 있고, 안목도 있고, 열정까지 갖추고 있어 취미를 창업으로 연결할 줄 아는 그들이 한없이 멋져 보이기만 하다.

그들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내게도 소박한 기술이 있다. 한국을 떠나서는 별로 쓸 일 없을 것 같은 '국어' 좀 잘하는 '글쓰기' 기술로 작업실을 오픈했고, 최근에는 파트타임으로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 육아에서 벗어나 작업실을 오픈한 것만으로도 좋은데, 파트타임으로 일 제안이 들어오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파트타임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세워진 몇 가지 원칙이 있다.


하나. 파트타임 업무에는 온 열정을 바치지 않겠다. 받는 만큼만 일한다.

둘. 불필요한 개인 돈은 쓰지 않겠다. 셔틀버스를 이용해 불필요한 교통비 지출을 줄이고, 집밥보다 맛있는 일터의 점심 제공을 놓치지 않는다.

셋. 오지랖 떨지 않고 내 할 일에만 충실하겠다. 내 업무 영역 외에는 말을 아낀다.

넷. 체력을 아끼겠다. 오후에 내 아이에게 쏟아줄 에너지는 남겨야 한다.

 

파트타임 일을 하면서 별문제 없이 지금까지 잘 지켜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생겨버렸다.

나는 아랫사람이 아닌데, 왜 아랫사람 부리듯 지시하고 행동하는지. 왜 애초에 얘기한 것과 달리  '하는 김에 그 정도쯤은 해줄 수 있잖아요' 하며 나의 업무 영역을 벗어난 일까지 시키려 하는지. 게다가 왜 자기가 만든 문제 상황을 회피하면서 처음 만난 나에게 떠넘기려고 하는지. 매우 불편했다. 자려고 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화가 났고, 오랜만에 겪은 일에 어이가 없었다. 지인의 부탁이라 무리해서 토요일에 추가로 하게 된 일이었는데, 무리할 필요가 없었나 보다. 한국의 사회생활은 여전히 이렇게 무례한가 싶은 회의감마저 밀려왔다. 나를 호구로 보기엔 내가 이미 세상을 알만큼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사람만 모르나보다.


씁쓸하지만, 상황의 불편함을 지인에게 얘기하고 한 주만 더 지켜보기로 했다. 한 주 더 지켜보는 것은 지인에 대한 예의일 뿐, 아무래도 조만간 그만둘 듯하다. 주말은 가족과 함께. 배려와 존중을 모르는 사람에게 나의 아까운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필요는 없다.


외로워도 슬퍼도 내 작업실이 제일 좋다. 나에게 일 떠넘길 사람도 없고, 지시할 사람도 없다. 요즘 어쩌다 보니 본업과 부업의 경계가 넘나들만큼 부업의 비중이 높아졌지만 아무리 분주하다 해도 작업실을 꼬박꼬박 오픈하는 이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커피 한 잔을 들고 성실하게 작업실로 출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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