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은 Jan 06. 2024

5년 만에 이사를 한다

이사를 끝내고 정신차리니 새해가 되었다. 

이사하기 전 

5년 동안 살던 집을 떠나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사를 준비하다 보니 미니멀하게 살겠다는 마음과 달리 아무것도 비워내지 못한 내가 보였다.


이 집으로 이사 올 때는 짐이 적었는데,
그 사이 고객님 짐이 엄청 많이 늘었네요.

지금 집으로 이사 올 때 도와주시고, 5년 만에 다시 만나 집을 둘러본 이사 업체 팀장님의 말이다. 의자 두 개와 매트리스 하나는 가져가지 않을 거라 말씀드렸지만, 크게 비용 차이는 없을 거라는 말과 함께. 

캐리어 2개로 시작한 베트남 생활이 14년이 지난 지금은 컨테이너 큐브 하나를 다 채울 정도의 살림이라고 하니 참 많이도 늘었다. 둘이 시작한 살림에 아이가 생기고 살다 보니 자연스레 늘었다지만, 이 많은 걸 싸들고 가려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집 꾸미기를 좋아해서 살림이 늘어난 건 아니다. 한국으로 떠나는 지인들이 남겨주고 간 가구들 덕분이다. 테이블, 피아노, 책장, 의자, 1인용 소파와 침대까지. 5년 전 이사 올 때도 열심히 버리고 왔는데, 이번에도 이사를 준비하며 5년 동안 쌓이고 묵은 짐들을 열심히 버리고 정리하는 중이다. 가장 버리기 어려운 건 아이의 물건이었다.  5학년 나이에도 손 때 묻고, 추억 많은 장난감과 인형들을 버리지 못하겠다 하니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가지고 있어도 한 번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사라지는 건 싫다는 이상한 심리다. 하나라도 더 버리고 가겠다고 애쓰는 나의 심리도 이상하긴 매한가지다.


이사 후 이야기

많이 비워내지 못했다는 자기반성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번 이사는 제법 성공이다. 쓰던 물건 그대로 가지고 이사를 하는데도 새로 필요한 물건이 많아서 마트에 가서 물건 채우기에 바빴던 지난 이사들과 달리, 이번에는 새로 산 물건이 거의 없다. 지난 일주일 동안 새 집에서 쓰려고 산 물건은 대걸레 하나뿐이다. 하나를 사면 오래 쓸만한 것들로 구입하고, 사는 데 굳이 불편하지 않다면 사지 않는 습관이 생기고 나니 이사를 해도 새롭게 필요한 것은 없었다. 

늘어난 물건을 넣어둘 수납장을 사거나 서랍장을 사는 대신 있는 가구에 맞춰 물건을 줄였다. 책도 계속 늘고 있지만, 책장을 사는 대신 기존에 있던 책을 정리했다. 아이들과 독서 수업을 하기 때문에 책은 계속해서 늘고 있는데도, 책장이 부족하지 않다. 책장도 잘 살펴보면 보지 않는 묵은 책이 꽤 많다. 물론 나도 소중한 책들을 평생 소장하고 싶다. 책을 사던 시기의 내 취향과 생각들을 엿볼 수 있기도 할 테니 말이다. 그래도 정착하지 못하는 삶에서는 일단 비우고 사는 게 좋은 듯하다. 정착하지 못했다면서도 벌써 베트남 생활 15년 차(이사를 하고 나니 해가 바뀌었다)가 되었지만, 며칠 전에도 아이와 함께 한국 귀국을 고민했으니 늘 마음은 떠돌이다.  

작은 주방에 주방 살림을 다 채우고도 비어있는 수납장을 보니 뿌듯하다. 이전 세입자가 다른 집으로 이사 가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집의 작은 주방 때문이라고 했는데, 나에게는 충분하다. 싱크대 위에 올려진 가전제품은 에어프라이기와 캡슐커피 머신, 전기포트 그리고 정수기가 전부다. 전자레인지는 원래 사용하지 않고, 전기밥솥으로 하는 밥이 더 이상 맛있다고 느껴지지 않아 매일 냄비밥을 짓기 시작한 게 벌써 4년째다. 잘 사용하지 않는 오븐을 정리하고, 한참 열심히 취미 생활하다가 흥미를 잃어버린 식품 건조기를 나눔 하고 나니 주방이 간단해졌다. 요즘은 좋은 제품들이 많이 나온다지만, 언제 떠나게 될지 모를 베트남 생활에서 더 이상 욕심나는 건 없다. 

이사하면서 찾아낸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상자 4개가 있지만, 추억의 물건들이니 만큼 정리하는 건 당분간 보류하기로 했다. 잘 보는 건 아니지만 가끔 아이와 게임하거나, 영화 볼 때 필요한 커다란 TV도 아이와의 여가 시간을 위해 당분간은 그냥 두기로 했다. TV 보는 걸 너무 좋아해 방송국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해외에 사니 방송 챙겨 보는 게 쉽지 않다.  


완전한 미니멀라이프는 아니지만, 필요한 만큼만 채우고 사는 미니멀스러운 노마드 라이프, 지금의 내 모습이다. 이삿짐을 싸고 푸는 게 너무 싫어서 하나 둘 정리하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나와 잘 맞는 생활방식이다. 이렇게 나는 늦깎이 나이에 내가 좋아하는 삶의 모습들을 찾아가고 있다.  


아이 : 엄마, 이사 괜히 왔어. 이제 집에서 불꽃놀이 못 보잖아.
나 : 아, 맞네... 불꽃놀이까지는 보고 이사할 걸 그랬다.

다행히 이사온 집에서도 조금은 더 멀어졌지만 새해 불꽃놀이를 볼 수 있었다. 다행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연말이면 시계가 고장 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