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방학을 맞이했다.
7월과 8월, 호치민의 여름방학은 참 길기도 하다.
학생들 대부분 방학을 보내러 한국에 간 덕분에 브레이크 없이 일만 하며 달리던 나에게도 강제 휴식이 주어졌다.
다니던 회사 일은 마무리했다. 그만둘 때는 섭섭했지만, 지금은 후련하다.
회사원이라면 다 알고 있을 압박과 업무 스트레스.
내 일이 아님에도 느껴지는 눈치.
해보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어도 내 생각처럼 쉽지 않은 회사 시스템.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힘든 사람들과의 갈등.
단지 아쉬운 건 소속감과 매 달 따박따박 꽂히던 월급이었다.
회사를 그만두면서 학생들과의 수업을 더 늘려 더 바쁘게 쉴 틈 없이 달렸다. 일부러 더 그렇게 했다. 나 지금 괜찮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계속된 무리에 먹어도 먹어도 살은 계속 빠졌고, 입안 곳곳이 헐어 말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수업을 했다. 반복되는 이런 일상에서 남몰래 건강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걱정도 많이 했다. 다행히 쉬다보니 다시 금세 회복됐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살 필요는 없었다. 잠시 '적당히'의 미학을 잊고 살았다. 아니, 꽤 오래 잊고 살았다.
그래서 이제는 그러지 말라고, 제발 숨 고르기 좀 하라고 나에게도 방학이 주어졌다.
간간이 호치민에 남아 있는 학생들과 수업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에는 그동안 못했던 일을 하고 있다.
우선 매일 해야 할 일을 노트에 시간대 별로 정리하지 않아도 돼서 좋다. 일요일 저녁이면 다음 일주일 동안 해야 할 일들을 요일 별로 정리해야 불안하지 않았고, 매일 아침에는 그날에 놓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또 한 번 정리하면서 머릿속에 하루를 그렸다.
인터넷상의 워크 시트는 익숙하지 않아서 그냥 종이에 할 일을 주욱 써 내려가고, 책상 한 켠에 두는 게 눈에 더 잘 들어왔다. 끝난 일을 빨간 볼펜으로 죽 그어버리는 쾌감도 좋았다. 요즘은 그 일과표 만드는 수고가 줄어드니 마음의 부담도 줄었다.
책을 가까이 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빌려놓고 몇 페이지 넘겨보지 못한 채 자동 반납되던 전자책들을 다시 빌려서 읽고 있다. 수업을 위해 사둔 그림책과 동화책들도 이제야 책상에 쌓아놓고 읽고 있다. 이렇게 술술 읽히는 걸 그동안 왜 못 읽었을까. 이게 다 마음의 여유 문제다.
새로운 마음을 위해 거실 가구 배치도 새로 했다. 세상에나, 이렇게나 여유로울 수 있다니!
다 컸다고 소홀했던 청소년이 된 아이와 이야기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아이 덕분에 근처 쇼핑몰에 있는 아이스크림 맛집을 알게 되었다. 당장 쓰지도 않을 샤프심을 사러 가겠다고 둘이서 한참을 걸어서 다녀오기도 했다. 다행히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사춘기 문턱을 넘으려고 준비하느라 말수가 적어지던 아이가 다시 수다쟁이가 되었다.
특별히 할 일 없는 날엔 둘이서 무료 전기 버스를 타고 1군으로 놀러 나갔다. 걷다가 우연히 탕후루 가게를 발견한 녀석은 그날 처음으로 환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여기는 여전히 한류 열풍이 있는 호치민이다)
"내가 꼭 와보고 싶었던 곳이야!"
쉬어보니 알겠다.
인생에서 쉬는 시간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렇게 나는 내 인생의 절반 즈음에서 쉼의 가치를 누리는 중이다.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아도, 지금 이 시간이 좋다.
주머니 사정은 조금 더 가벼워도, 지금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