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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Mar 11. 2020

자가 격리, 삼시 세끼는 먹어야죠

엄마! 나 친구가 생겼어.

자가 격리의 가장 힘든 것은 아마 삼시 세끼를 챙겨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한국에 있던 2주 전에도 자가 격리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느라 친정 엄마가 챙겨주는 밥을 끼니마다 꼬박꼬박 얻어먹었는데, 지금은 제가 두 삼식이와 함께 매 끼니를 챙기고 있습니다. 친정 엄마도 졸지에 자가 격리된 자식과 손주가 삼식이로 등장해 꽤나 힘드셨을 듯합니다. 그래도 빨리 다시 오라고 하시는 거 보면 자식도 손주도 그리우신가 봅니다.


자가 격리. 정말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습니다. 집에서 냉장고 파먹기를 하면서 매 끼니를 챙겨 먹는 데 한계가 왔습니다. 매일 같은 반찬에 국이나 메인만 바뀌는 정도니 아이도 점점 밥상에 흥미를 잃어가고, 결국엔 한 번 소동이 일어났지요. 대단한 밥상은 아니어도 한 시간을 주방에서 뚝딱거리며 만든 식탁 앞에서 밥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이는 뜬금없이 식탁에서 책을 읽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밥을 치우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엄마와, 책을 읽겠다고 고집부리는 딸 사이에서 남편은 눈치만 두리번거리며 밥을 먹습니다.

그 날 저녁, 수고를 몰라주는 아이에게 서운하기도 했지만, 아이의 입장도 천 번 만 번 이해가 됩니다. 한창 뛰어놀 나이에 얼마나 지루할까요. 외출을 금지당한 채 집에만 있으니 아이도 저도 점점 입맛을 잃어갑니다. 듯 매일 입에서 단내만 나는 것 같습니다. 남편이 사다 주는 기본 재료들로 밥상을 차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뛰어난 음식 솜씨라던가, 주방에서 아이디어가 샘솟는 형편도 아니어서 매 끼니를 차리는 건 셀프 아이디어 싸움입니다.


김치볶음밥, 비빔밥, 떡만둣국, 소시지 야채볶음, 삼겹살... 

가끔 라면, 가끔 떡볶이... 

그냥 카레, 돈가스 카레, 새우튀김 카레... 

낯선 고사리도 볶고, 콩나물무침도 해보지만 정말 그 나물에 그 밥입니다. 

어른이야 김치찌개든, 청국장이든 있으면 되지만, 매운 걸 잘 못 먹는 아이의 밥상은 까다롭습니다.


14*3=42. 격리 2주간 42번의 밥상이 어찌 새로울까요. 한국이라면야 다양한 식자재와 반조리 식품들, 배달이 있지만, 베트남에서는 형편이 다릅니다. 주부 고수도, 해도 해도 제자리걸음인 모양만 주부인 저 같은 사람도 마트에 가면 카트를 들고 뭘 사야 할지 고민하며 헛돌 뿐입니다. 언제나 조촐할 수밖에 없는 밥상을 보고 있자니 주방에서의 수고도 헛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결국 이번 주에는 배달의 손길에 의지했습니다. 맥도널드 해피밀을 주문하기도 하고, 피자 1+1도 주문하고, 어제저녁에는 아이의 강력한 요청에 치킨을 주문했습니다. 이것도 남편이 있을 때나 가능한 호사입니다. 저는 배달음식을 받으러 1층까지 내려갈 수 없으니까요. 

요즘 하루 일과는 단출합니다.


<아침>

#미적거리다가 아침식사

#청소, 필요하면 빨래

#오전 아이 과제 봐주기(그나마 요즘은 담임선생님과의 화상 그룹 수업으로 조금 수월합니다.)

#아이 수업하는 동안 방에서 책 읽기(노트북으로 수업을 해서 작업은 불가능합니다.)

#점심 메뉴 고민하며 주방의 늪으로...


<어느새 점심>

#점심식사는 주로 분식으로 해결 (요즘 아이는 맵지 않은 국물떡볶이에 빠져 있어서 메뉴 고르기가 쉽습니다.)

#개인 작업하기 (중간중간 아이에게 맞장구 쳐주기)

#아이의 남은 과제 마무리시키기 (매일 과제물을 찍어서 이메일로 보내야 하기에)

#프랑스어 또는 영어 애니메이션 보여주기

#저녁 메뉴 고민해서 또다시 주방으로 


<또다시 저녁>

#배고프지 않지만 저녁 식사

#개인작업(빠른 마감을 위한 고군분투)

#아이와 플레이타임

#가끔은 가족 보드게임


금연......

아이도 저도 요즘은 정신을 놓고 사는 듯합니다. 둘이서 댄스 대회도 열고, 아이가 준비한 한 시간 짜리 마술과 연극이 복합된 쇼를 보기도 합니다. 어느 날은 풍선에 끈을 달고는 그걸 옷에 묶어서 혼자 뛰어다닙니다. 풍선에게 "따라오지 마! 따라오지 마!" 하면서요. 혼자서 까르르 거리며 신나게 풍선에게 안 잡히려고 뛰어다닙니다. 어느 날은 점심을 준비하는데 아이가 그럽니다. "엄마! 나 친구 생겼어!" "누군데?" "나 지금 선풍기랑 풍선 주고받기 놀이하고 있어." 어떻게든 노는 법을 터득하는 게 신기하면서도 안쓰럽습니다.

"엄마, 나 신발 닦았으니까 용돈 주세요."

"그래? 아빠 꺼 깨끗이 닦았어?"

"아니. 내 거"


거실은 발 디딜 틈 없이 책으로 널려 있습니다. 책으로 집 짓는 방법을 알려주니 도서관을 만들겠다며 정리하려고 꺼내 둔 전집 두 질로 거실 전체를 책 세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책을 타 넘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도서관 놀이라며 세워둔 책들을 읽는 걸 보면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매일 이런 집에서 산다면야 정신 사납겠지만, 며칠 정도는 참아줄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가끔은 이벤트처럼 거실을 도서관으로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드디어 내일이면 자가격리가 해제됩니다. 아무런 증상 없이 건강하게 마무리할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더 이상 아침저녁으로 체온을 재서 보내지 않아도 됩니다. 

내일은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만끽할 예정입니다.

공원도 한 바퀴 돌고,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도 여유롭게 마시고 싶습니다.

먼저 자가격리에서 해제된 친구가 그러더군요. "자가 격리 끝난 하루만 좋아. 다음 날부터는 다시 자연 칩거된다." 그래도 강제성이 사라진다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베트남에서는 한동안 없던 코로나 19 확진자가 며칠 전부터 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발 감염입니다. 확진자가 늘어나는  것은 불안하지만, 그래도 이곳의 한인들은 한국으로부터 감염되는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습니다. 이미 한국인이라고 눈치 보며 사는데, 한국인 감염이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지요.

다음 주에는 학교에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늘어나는 베트남의 코로나 확진자 추세에 학교 등교 여부는 금요일까지 또 기다려봐야겠습니다. 이대로 부활절 방학을 맞이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도 자가 격리가 끝나는 게 기분 좋은지 친구네 놀러 갈 거라며 배낭 한 가득 짐을 챙겼습니다. 

일단 내일은 누려야겠습니다. 

호치민에서의 평범한 일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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