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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Aug 01. 2021

넌 꼬맹이가 아니다

누구냐 넌.

주방에서 오이장아찌를 만들고 있었다. 피클과 장아찌의 중간쯤인  맘대로 오이장아찌는 라면이랑 먹어도 맛있고, 떡볶이와도  어울린다.


쉴틈없이 떠들며 집안을 휘젓고 돌아다니다가 목이 말랐던지 물을 마시러  아이가 오늘따라  작고 귀엽게 보여서 다정하게 불러보았다. 이렇게.

꼬맹아


우리  어린이는  말이 듣기 싫었는지 바로 “아니야!”하며 반박을 했다. 하긴 벌써  살이니 꼬맹이라는 말은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그럼 어린이라고 부를까?


그것도  된단다. 자기는 어린이가 아니란다. 그러니 다른 호칭으로 불러달라며 인상을 썼다. 어린이를 어린이라고 부를  없는 당황스러움이란.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불러주었다.


학생


역시 퇴짜를 맞았다.

알았어. 그냥 이름 부를게. OO.”

“그것도 싫어.”

난감해졌다. 오이 다가 이게 무슨 호칭 설전인지.


장난으로 “꼬맹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내 아이에게도 호칭은 조심하는 편이다. 특히 아이에게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호칭은 “~”이다.


, 이리 와봐.”,

,  이거 뭐야?”


“야”라는 말을 들으면 혼나거나, 무시당하는 것 같다. 나도 듣고 싶지 않은 호칭을 아이에게 쓰고 싶지는 않다.

라는 단어도 단독으로는  지 않는다. 00 너는 어떻게 생각해?”처럼 이름과 같이 쓰고 싶다. 그게   애정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독서교실에서 아이들을 만날 때도 항상 이름을 불러주는 선생님이고 싶다. “야”라는 말을 쓸 일은 없기도 하지만, ‘너’라는 호칭보다는 이름을 더 많이 부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아이들은 누군가 자기 이름을 틀리게 말하는 것에 굉장히 실망한다. ‘연’을 ‘현’으로 잘못 부르는 것도, 친구와 이름을 바꿔 부르는 것도 서운해하기 때문에 바르게 불러주기 위해 꽤 열심히 노력하게 된다.


요즘 복병이 나타났다. 온라인 수업은 주로 부모님의 이메일 주소로 참여하기 때문에 아이들 영상 밑에 부모님의 이름이 뜬다. 수업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아이 이름이 아닌 화면에 적힌 부모님의 이름으로 아이를 부르게  때가 있다. 실수한 순간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화면에 아이들 이름을 붙여놓고 싶은 심정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름으로 불리는  좋아했다. 결혼해서 “자기야라고 부르는 남편에게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요구했다. 결혼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편은 나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아이의 친구들은 나를 부를 때 우리 집 어린이의 이름 뒤에 이모를 붙인다. ‘00이 이모’. 그런데 한 녀석이 꼭 내 이름을 붙여서 이모라고 불러준다. 그 녀석이 내 이름을 불러줄 때마다 자꾸 내가 존중받고 인정받는 것 같아서 더 친밀하게 느껴진다.


자려고 누웠을 때 어린이에게 슬며시 물어봤다.

“꼬맹이라고 부르는 게 싫었어?”

뜬금없는 질문이라는 듯 아이가 대답했다.

“그게 왜? 난 좋은데? 꼬맹이라고 불러. 나 꼬맹이 맞잖아.”


이럴 땐 세상에서 제일 쿨한 아이 같다. 이렇게 쿨한 허락은 받았지만, 꼬맹이라고 부를 마음은 없다. 키는 작아도 열 살이 되기까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자란 아이에 대한 존중이다. 물론 내 마음속에서는 영원한 꼬맹이지만.


은밀하게 뭔가 작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집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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